1924년 5월 19일 압록강의 총 소리 막전막후
국사 시간에 짤막하게 배우고 넘어가는 대목이 있다.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정부가 직할하였다” 이 짤막한 단락으로 한국사 시험보는 고시생들이나 고교생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이름도 어찌나 비슷비슷한지 사지선다나 오지선다에서 잘못 짚기 딱 좋았으니까 말이다.
우선 이야기의 시작은 ‘통의부’라는 조직에서 해야 한다. 통의부는 1922년 8월 만주 환인현에서 각처로부터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남만한족 통일회의’를 거쳐 결성된 단일 투쟁 조직이었다. 통의부는 군대의 명칭을 의용군이라고 했는데 이 의용군은 1923년 한 해에만 무려 735회에 걸친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그 중의 하나를 예를 들어 보자. “우리 무장대원 30여 명은 9월 21일 밤 9시경에 평북 희천군 북면 명문동에 도착해 먼저 전신, 전화선을 끓고 적경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자 적경이 곧 응전했고 적경 1명이 즉사했다...... 아군이 여러 곳을 방화하자 또 총격전이 벌어져 적 1명이 전사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나 아군은 무사했다. 그 후 아군이 다시 화경면을 습격한다는 설이 낭자해 부근 일대의 인심이 흉흉하고 우편송달이 못되었다.” (독립신문 1923년 10월 13일자)
독립군이라고 하면 수천 명 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인 청산리 전투나 봉오동 전투만 애써 기억하지만 기실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예는 드물다. 무장 투쟁의 상당 부분은 수십 명 규모의 유격대가 파출소(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우체국 등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걸 두고 뉴라이트들은 “독립군은 사라졌고 비적만 남았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압도적인 일본의 무력 앞에서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리고 최선의 투쟁방식이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국경 지대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고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잠 못자 벌건 눈을 부릅뜨고 한만 국경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 강성한 통의부가 와해된 것은 내부의 다툼 때문이었다. 조국 해방이라는 뜻은 같이 할 수 있었지만 그 조국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대한 독립단이라는 단체의 조국관은 좀 문제가 있었다. 이들은 경술국치 이후 황제는 이왕으로 격하된지 13년이 흐르도록 여전히 ‘융희’ 연호를 쓰고 있었다. 즉 아직까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절대 가치로 고수하고 있던 복벽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군주제를 거부하는 상해 임시정부조차 한동안 거부할 정도였다. 이들 중 일부는 공화주의적 노선을 견지하던 통의부 지도부를 습격하여 선전부장 김창의를 죽이고 양기탁 등을 구타하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통의부를 탈퇴한다. 그들이 만든 것이 의군부다. 함께 대한 독립을 부르짖으면서도 일편단심 군주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 진보를 부르짖기는 하지만 그 충성의 대상이 애매한 세력을 연상시키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1924년 5월 대한통의부 의용군 1,2,3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 대표들은 통의부 탈퇴를 선언하고 임시정부를 자신들의 상부기관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이른바 참의부가 결성된 것이다 . 참의부는 철저한 무장 투쟁을 주장했고 그를 실천에 옮긴 조직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1924년 5월 19일 압록강변에서 벌어진다.
이날 새벽 참의부 대원들은 압록강을 사이에 둔 중국땅, 즉 옛 고구려 수도 집안현 근처에 매복해 있었다. 그 맞은편은 평안북도 강계.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그 누군가란 놀랍게도 일본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였다. 3.1운동 이후 부임하여 무단통치를 철폐하고 ‘문화정치’라는 온건하다기보다는 교활한 통치술을 구사했던 사이토는 상시적인 치안 불안 지역이었던 함경도 평안도 지역을 순시하면서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고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유자적 압록강 뱃놀이하듯 미끄러져오던 총독의 순시선 두 척을 향해서 참의부 용사들의 총이 불을 뿜었다. 안타깝게도 거리가 멀어 기관조수 한 명을 부상시키는 데에 그쳤지만 별안간 날아오는 총알의 소나기에 총독 일행은 대경실색하여 도망한다. 이 거사를 주도한 이의준 (가명 한권웅)은 후일 일제에 잡혀 사형당한다.
이후로도 독립운동 진영은 고질적인 내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통의부 잔존 세력이 초대 참의장으로 “돼지족발을 뼈째 씹어먹었던” (이덕일의 파란만장 참의부 중) 장사 중의 장사 백광운을 암살하는 일도 있었고 서로를 밀정으로 의심하고 치고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 진짜 밀정의 제보로 참의부 지휘부가 몰살당하는 고마령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참담해지기까지 하는 독립운동사의 흑역사 가운데 참의부 간부로 활동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참담함을 조금 가시게 해 준다.
그의 이름은 마덕창이다. 본명은 이종혁. 덕수 이씨로 이순신 장군의 후예다. 그는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으로서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소련 적군과 싸우고 그 적군(赤軍)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맞선 조선인 독립군들과도 전투를 치렀다. 한 포로에게서 “조선인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하는 피맺힌 질문을 받는 등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3.1운동을 지켜보면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여 중국인같은 이름 마덕창으로서 참의부 간부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지만 일본군 장교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5년형이라는 실로 가벼운(?) 형을 치르게 된다. 그는 이 5년간을 일본군 경력 5년과 상쇄한다는 마음으로 수도자같은 자세로 보냈다고 한다. “전향서를 쓰고 어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전향 공작 (이것도 참 역사가 유구한데)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한번 자기를 속이면 평생 그 가책을 이겨낼 성 싶지 않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태양에도 흑점이 있는데 어찌 빛나는 역사만 있을 것이며 시궁창같은 역사라고 어찌 그 안이 오물로만 찼을 것인가. 1924년 5월 19일 일본 총독 사이토의 자신만만한 순행을 혼비백산의 도망길로 만들어 버린 참의부 대원들의 용감한 총성의 막후에는 차마 돌아보기 어려운 아집과 배신과 반목의 역사도 자리잡고 있었고 일본군 장교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 독립운동에 나섰던 의기 또한 존재했다.
마치 오늘날의 이슬람이 서구에 저항하는 방식과 흡사하죠.
게릴라식 전투는 외형적 힘이 부족한 사람들이 강한세력에
저항할 유일한 방법이였겠죠.
그렇게 뜻을 모아 싸우는 과정에서 어떤 조국을 건설할지에 대한
편가르기 싸움이 특히 안타깝네요.
그게 분단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셈이죠.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옳은 말씀이십니다.... 임정은 파벌 싸움 끝에 빈 껍데기가 됐고 제대로 된 좌우합작과 통일된 대오는 해방 때까지 이루어내지 못했죠. 그 와중에도 지켜야 할 걸 지켰던 이들께는 영광이 돌아가야 합니다만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