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용 쓰이는 형용사인 "남자답다"는 말이 나와 잘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지만 종종 '남자'라는 말을 앞세워 가면서 '남자 망신 다 시키는 쉐이들'에 대해 핏대를 세울 때가 있어요. 이를테면 밖에서는 소 발에 밟힌 쥐의 비명 소리만큼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주제에 집에서 허구헌날 마누라와 자식 새끼 때려잡는 걸로 세상 스트레스를 푸는 족속들 보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남자 망신은 니들이 시킨다 하는 소리가 혀끝에서 팽이를 돌게 마련입니다. 영화 "똥파리"에서 주인공이 일갈하듯 "집에만 들어오면 지가 김일성인 줄 아는" 애비들은 여자들이 나서기 전에 남자들이 나서서 좀 밟아 줄 필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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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까지 제가 본 최고의 남자망신살, 대한민국 남자들 얼굴에 된똥칠을 한 자를 꼽으라면 저는 좀 엉뚱한 사람을 꼽아요. 바로 가수 B의 전 애인입니다. 매니저도 겸업했었다고 알구요. 남자와 여자로 사귀면서 그는 '보험'으로 섹스 비디오를 찍었고 그녀와 틀어지게 되자 그 테이프를 유포시키고 자기는 외국으로 튀었었지요.
너 왜 나 배신하냐고 주먹으로 치고 깜방에라도 갔으면 남자 망신 또 한 번 나왔다는 헛웃음 한 번으로 끝났겠지만 이 지리산 호랑이가 물어가다가 역겨워서 뱉어버릴 작자의 행각은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사람들 체면을 하수처리장으로 보냅니다. 아니 무슨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의 섹스를 몰래 찍어서는 언젠가 뒤통수 칠 도끼로 사용할 셈을 하며, 자기도 버젓이 등장하는 동영상을 뿌리고는 자기 혼자 도망간단 말입니까. 사형제도는 몰라도 궁형제도는 좀 도입하고 싶어집니다.
그 사건 이후에 가수 B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제가 짐작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피해자로 보호받아야 할 그녀가 왜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해야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그녀는 거의 5년 동안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결혼 전에 남자와 섹스한 것이 죄가 되었던 조선 시대도 아니고, 하다못해 '음란 동영상' 제작에 참여한 것도 아닌 한 여자 가수가 그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와 즐거운 시간을 가진 죄로 한창 잘 나가던 길에서 추락하고 모든 방송으로부터 추방되었던 겁니다. 이로써 이 사건은 남자 망신의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망신으로 가열차게 승화되었다고 보아야겠지요. 도대체 우리는 왜 그녀를 구할 수 없었던 걸까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고개 쳐들고 주먹 휘두를 처지에 있지 못합니다.
언젠가 후배 PD가 기부 프로그램을 할 때 불쌍한 아이를 도와 주는 연예인으로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던 B를 섭외했어요. 몇 년 전의 B였다면 우리가 삼고초려를 했을 테지만 그때의 B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의 자세로 PD를 감동시킬만큼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고 해요. 그날 저도 촬영 구경을 갔었고 그녀와 악수도 나눴습니다. 후배에게 "잘 됐다 이쁘게 편집해 드려라."고 얘기하면서 그녀가 뜻하지 않게 겪어야 했던 형극의 부당함에 침 깨나 튀겼었지요.
이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외주제작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지요. "걔 빼라." 이유는 짐작하시는 바입니다. 시청자들의 거부감...... 뭐 그런 거지요. 그런 사람 꼭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전화해서는 "애들 보는 방송에 왜 그런 애를 내보내느냐."고 펄펄 뛰는 열혈 엄마 또는 아빠들. 그런 사람들의 악다구니를 뭣하러 자초하냐는 거지요. 그냥 안내보내면 그만인데.
까라면 까는 건 군대 뿐이 아닙니다. 촬영분은 무효가 되었고 후배는 이를 갈면서 다른 연예인을 섭외해서 초치기 촬영으로 땜방질을 해야 했습니다. 나도 혀를 차는 거 외엔 할 일이 없었구요. 네? 용감하게 왜 B를 방송에 걸자고 나서지 못했냐구요? 너도 남자망신 꽤나 시킨다구요. 옳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B 빼라고 요구한 사람들 모두 남자의 자격 따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지요.
불방이 결정된 날 밤에 사무실에 있는데 B의 코디라던가 뭐라던가 하는 여자의 전화가 걸려 왔어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전화였지요. 미안하지만 어쩝니까 방송이 안될 거 같다고 얘기해야지. 그러자 수화기 저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좀 격해졌어요.
"그 일 때문인가요."
"아.... 저.... 그..... " (아 이런 비겁한 남자의 말더듬이라니)
"B언니 좀 봐 주세요. 너무 불쌍해요."
"에... 또..... 그게요. 저희가 아니라....."
"알아요. 말씀 안하셔도 되구요. B언니 정말 좋아했어요. 도와줄 애한테도 진심으로 잘하려고 했구요."
"네? 네..... 네." "
"안녕히 계셔요. "
그때 내 얼굴은 소주 댓 병은 병나발 분 것처럼 새빨개졌던 거 같아요. 우리보다도 먼저 촬영 현장에 도착해서 분장까지 끝내고 있었던 B의 얼굴이 큰바위얼굴처럼 눈앞을 덮쳐 오는데 아주 압사할 지경이더군요. 부끄러움과 화딱지와 난처함이 뒤범벅이 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냥 B의 옛 애인이자 매니저만 입 속에서 곤죽이 될 정도로 씹는 것으로 기분을 풀었지요. 개새끼 남자 망신은 다 시키는 새끼.
그리고 2020년 3월. 'n번방'과 '박사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는 또 한 번 남자로서 창피함을 느낍니다. 물론 이걸 왜 남자 일반의 문제로 보느냐, 왜 죄도 안 지은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느냐 하는 항변에도 일리가 있을 겁니다. 어떤 젊은 친구는 "남자로서 누릴 것 누린 꼰대들이나 죄책감 가져라,"고 하더군요. 수용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양 비디오가 나왔을 때 저를 포함한 많은 남자들이 했던 행동들을 기억하고, 카톡방에서 '좋은 그림'이라고 누가 올렸을 때 제 반응 (정색을 하고 말리지는 못했습니다.)을 포함한 주변의 대응 역시 기억하며, 누군가 비디오가 있니 없니 한 순간 네이버와 다음 실검 1위에 뜨고 '자료 공유'가 빛의 속도로 이뤄지던 풍경의 목격자로서 저는 남자들아 부끄러워하라는 외침에 강하게 반발하기는 어렵습니다. '남자 망신'을 시키는 자들에 대해 남자들이 좀 더 강경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사방의 짐승들에게 남자들이 나서서 인간 교육을 시켜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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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u cu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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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서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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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스스로 제 자신이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은 안하기에 남에게 뭐라고 훈계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녀간에 최소한의 도리정도는 지켰으면 하는데 누구에게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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