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도박

in kr •  7 years ago 

설날의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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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아는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은평구 구산동에는 결핵마을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은평구 역촌동에는 결핵 특화 병원으로 유명한 서북병원이 있는데 이 병원에 의지해 사는 환자들이 모여 살았던 판자촌이었죠. 2000년 음력 설을 앞두고 그곳을 찾았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서울특별시라는 곳 안에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지척에 번화한 거리가 있고 깔끔한 옷가지를 두른 사람들의 발걸음이 부산했건만 결핵촌에는 제가 어릴 적에도 쉽사리 보지 못했던 가난과 고단함이 자갈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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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매년 익명으로 쌀을 기부하고 있다는 한 ‘이름 없는 천사’ 아이템 때문이었습니다. “음력 설 전날만 되면요. 이 마을에 트럭이 나타난대요. 쌀 포대를 가득 싣고 말이죠. 그래서 거기 복지관 마당에 뿌려놓고 사라진대요. 사람들이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해도 절대 아무 말도 안하구요. 그냥 산타클로스같이 뿌려놓고 트럭 타고 사라진대요.” 작가의 전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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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촌 아저씨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이가 숭숭 빠지고 얼굴에 주름이 거미줄처럼 쳐진 아저씨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며 ‘고마우신 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언젠가 공무원 아가씨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꼭 좀 누구인지 함자나 알려 달라고. 그래서 내 죽은 뒤에라도 어디 염라대왕 앞에라도 가서 그분 복 주시라고 하려고 그랬는데 당최 알려 주시지를 않는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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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를 만났더니 역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회복지사는 그다지 취재를 내키지 않아했습니다. “그게.... 도움 받는 사람들한테도 이름을 안 알리시는 분이 취재를 허락하실까요?” 당시 6년차 PD로 패기에 넘치던 저는 딱 잘라 말했지요. “설득해야죠. 이 힘든 IMF 시기에 니라니라....... 누구를 돕고 또 그에 감사하는.... 니라니라.... 이런 일은 더욱 더 알리고..... 좋은 일을 누구 알아 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저희는 그걸 더욱 더 퍼뜨려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고 니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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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는 계속 고개를 저었습니다만 뜻밖의 응원군이 나타났습니다. 그 마을에서 무척 존경받는 장로님인가 하는 분이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해 준 얘기로는 마을의 대부 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사회복지사와 열띠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고서는 다가오셨습니다. 사정을 물으시길래 이차지차 얘기를 했더니 그분은 전폭 지지와 찬동을 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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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님 말이 맞아. 이런 일은 널리 퍼뜨려야 돼요. 그분도 놀라시긴 하겠지만 취재 취지에 공감하실 거야. 또 이렇게 방송에 나가면 우리 마을에 도움이 더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그분이 원치 않으시고 만약 화를 내시면......”
“화를 왜 내요? 그분이 설 전날 오신다면 내일이네. 마을 사람들한테 얘기해서 꽃다발도 좀 준비하라 그러고..... 그런 거 촬영 좀 합시다.”
“그래도......”
“어허 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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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의 말빨은 꽤 강력했습니다. 공무원 신분도 아니었지만 동사무소 직원도 말대꾸를 못할 정도였죠, 저야 감사할 따름이었고 맞장구를 칠 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네 그렇죠.” “네 바로 그런 취지입니다.” 대부(?)는 이미 취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출연시킬 사람들까지 꼽고 있었지만 그 옆에서 사회복지사는 울상이 돼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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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약속까지 잡은 다음 의기양양해서 마을을 떠나 고갯길을 내려오는데 사회복지사가 따라붙었습니다. “꼭 찍으셔야겠어요?” 마을 사람들이 촬영에 응하겠다는데 공무원이나 기타 관계자들의 반대는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된 터라 저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해야죠.” 그러자 복지사는 정색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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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직 그 분 이름을 몰라요. 가르쳐 주시지를 않아요 몇 년째. 그래서 제가 한 번은 이름이라도 알자고 졸라댔더니 이러시더군요. ‘당신이 내 이름을 알게 되시면 난 이 일을 더 안할 거요.’ 그런 분이에요. 촬영이네 방송이네 하면 전 정말 감당이 안될 것 같아요. 설 전날 이분이 오시는 건 이 마을 사람들한테는 1년에 몇 안되는 기쁨이에요.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좋은데 마을 사람들에게 이 기쁨이 사라지면 어떡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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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외면하고 회사로 돌아와 작가와 상의를 했습니다. 방송 앞에서 욕심이란 작가나 PD나 마찬가지인지라 작가도 그 이름없는 천사를 ‘방송 최초’로 공개하고 싶어했고 나올만한 그림들을 상상해 가며 들떠 했습니다. 하지만 복지사 얘기를 들려주니 입꼬리를 말며 고민에 빠지더군요. 그때 작가가 무슨 그런 걱정을 하냐며, 방송하는 사람들이 따귀 빼고 선지 빼고 뭘 하겠냐며 밀어부쳤다면 저 역시 어마 뜨거라 맞어 하면서 결의를 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우리 때문에 다음 설에 안오면...... 어떡하죠?” 이 말을 하자 저도 모르게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내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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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이템에 대한 욕심은 남았습니다. 전화번호를 드리고 온 마을의 대부님께도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내가 나서서 설득이라도 할 테니 진행하십시다.” 이렇게까지 나오시면 조금 그 속내가 엿보입니다. 이분도 방송 나오고 싶은 거지요. 원님 따라 나발 불고 싶은 거지요. 방송은 원래 나발 부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니 제게는 반가운 응원군이었습니다만 그 응원이 제게 힘을 불어넣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가 보죠. 가서 분위기를 좀 보세요. 다른 아이템 찾아볼게요.” 작가의 말이었고 저는 카메라를 메고 구산동 고개를 걸어올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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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사회복지사가 나와 있었습니다. 촬영이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인지 그녀도 체념하고서 촬영에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를 물어 왔습니다. 마음 속은 갈등을 ‘때리고’ 있었지만 짐짓 꼭 아름답게 촬영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겠노라 기염을 토하는데 사회복지사가 이런 말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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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여야 아름다운 건 아니에요. 꼭 알려야 좋은 것도 아니구요. 저는 이곳 분들의 설날을 걸고 도박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요.”
“도박이요?”
“촬영하고 좋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안좋을 수도 있겠죠. 전 안좋은 쪽을 너무 생각하기 싫어서 그래요.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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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트럭이 온다는 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산타클로스가 온다며 수군대고 있었습니다. 그 쌀로 무슨 떡을 얼마나 하자, 누구 집에 좀 몰아 주자 논의도 부산했습니다. 음침해 보였던 마을에 화기가 돌았고 결핵 환자들의 창백한 얼굴에도 홍조가 비쳤습니다. 윷판도 벌어졌고 지팡이 짚은 노인들도 개야 걸이야 윷을 내던졌습니다. 날은 차가웠지만 마을은 훈훈해지고 있었죠. 내일이 설이구나. 그리고 이런 게 설이구나 싶었습니다. 불현듯 결심이 서더군요. 도박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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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대부님께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한데 카메라가 고장입니다. 며칠 전부터 불안불안하더니 아예 돌지를 않네요. 회사에 예비 카메라도 없어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 나도 이거 찍고 싶어 미치겠는데...... 그분 오시면 인사 잘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앞에서 작가에게 전화를 했지요. “카메라 고장났어. 못 찍겠어요.” 작가의 대답은 대부님 들릴까 걱정될 만큼 컸습니다. “안되겠구나? 그래요 그냥 와. 다른 거 찾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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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몹시 부는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예의 사회복지사를 만났습니다. 실실 웃으면서 얘기했지요. “아 이거 참 카메라가 고장이 나서......” 그러자 사회복지사도 풉 웃으며 “어떡해요?” 말을 받았죠. 그럼 안녕히..... 하면서 작별을 고하는데 사회복지사가 깊숙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 왔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살아오면서 그런 직각 인사는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화급히 허리를 그만큼 굽히며 인사를 했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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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펑크난 아이템 때문에 팀장한테 경을 치도록 혼나기는 했으나 그 설날 아침은 개운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각 인사에 실린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요. 그 설 이브를 생각할 때마다 그 ‘도박’은 성공적이지 못했을 것이라 혼자 되씹곤 합니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 라고 했던 이솝 우화 속 여우일 수도 있겠지만 웬지 그 아이템은 포기했던 것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꼭 설 연휴 이후 걸려 온 전화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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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복지사예요. 그날도 트럭이 왔어요. 제가 살짝 방송 얘기를 해 봤더니 그러시더라구요. ‘뭐든지 몰래 하는 게 재밌잖아. 나는 몰래 하고 싶어. 왜 그걸 들쑤셔?’ 아주 웃겼어요. PD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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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쌀포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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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만드는 글 잘 읽었습니다.^^
팔로우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 기분 좋은 글이네요. 아주 좋아요. 복 받으실 거예요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 복많이 받으세요

명절 때 이런 좋은 소식 넘 좋아요...^^

네 저도 간만에 기억났습니다

양자역학 같네요. 관찰이 현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어우 어려운 말씀 ^^ 하지만 맞는 말씀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글 잘읽었어요~
팔로우&보팅하고 갑니다~^^
시간나시면 맞팔 부탁 드릴께요!

네 맞팔 드렸습니다 감사 ^^

훈훈한 글 잘읽었습니다. 팔로우하고 업보트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마음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꼭 보여야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꼭 알려야 좋은 것도 아니라는 사회 복지사님 말씀이 참 좋습니다
배팅하진 않으셨지만 도박에서 이기셨네요!

이겼다고 혼자 생각하는 거죠 뭐 ^^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덕분에 날개없는 천사의 선행은 계속되었군요
잘하셨네요
팔로우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맞팔 하겠습니다

정말 훈훈한 이야기입니다. 대놓고 하는 봉사는 이미 그 보상을 받은것이고 이렇게 남모르게 하는 봉사야말로 진정한 이웃사랑이 아닐까싶습니다. 저 많은 쌀을 직접 트럭에 실어 전달하는 그분에게 신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실것 같아요. 세상곳곳에 조용한 천사들이 숨어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네 하지만 드러내놓고 하는 봉사 역시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심만 없다면 충분히 존경해야 하겠죠..... 물론 조용한 천사들도 그렇지만요

대박의 기운이 있는 아이템을 포기하신 것이 대단하시네요. 엄청 깨질 것을 아시면서도요. 하지만 말씀처럼 혹여나 그분께서 촬영 후 다시는 오지 않는다면 그건.... 훈훈한 이야기 즐겁게 보고 갑니다.
설 즐겁게 보내세요!

하하 뭐 그래도 작가의 지원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 작가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18년 뒤에 ㅋㅋ

참 가슴따뜻한 이야기네요
역촌동 에 오래 살았는데 구산동에
그런곳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