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하의 마지막 외침

in kr •  6 years ago 

1983년 11월 8일 황정하의 추락

대개 무용담은 화려하지만 지루하다. 무용담(武勇談)이란 대개 더 이상 무용(武勇)이 필요 없는 시기에 토로되기 때문이고, 따라서 별 효용 가치가 없는 무용담(無用談)이 되기 쉬운 탓이다. 또 월남전 스키부대나 충청북도 해군 용사 같은 사기성 짙은 무용담이 판을 치기에 그 신뢰도 또한 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래도 무용담이 의미 있는 것은 한때 그 무용이 절실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의 그 숱한 무용담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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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페븍 ‘친구’라는 불경한 언어로 묶여 있지만 한때 쳐다보기에는 목이 아팠던 허인회 선배를 처음 본 건 88년 문무대 입소일이었다. 허인회 선배는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유니폼이었던 빨간 체육복(교련복 입고 오라는 지침을 무시하고)을 입고 웅성웅성 앉아 있던 88학번들 앞에서 그야말로 사자후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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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관 3층 창문이 깨집니다. 밧줄이 내려옵니다. 누군가 그 밧줄에 매달려서 메가폰으로 소리를 지릅니다.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 유인물이 눈처럼 휘날리고.....” 마치 연설을 통해 슬라이드가 보여지는 듯 생생한 연설이었다. 시위를 할 수가 없어서, 학교에 전경이 가득 차 있어서 학생 서너 명만 모여도 어이 집에들 가 하고 짭새가 등을 치고 “학우여!”를 외칠 틈도 없이 “학”.....하다가 끌려갔다는 시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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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1월 8일 서울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황정하라는 학생이 시위 주동자로 뜬 것이다. 그는 얼마 후 한국을 찾게 되어 있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취임 후 첫 번째 초청 대상자로 전두환을 선정했던, 그래서 변방의 민주화니 뭐니 하는 혼란보다는 “들쥐같은 국민들”의 확실한 독재자를 선택했던 그는 그즈음 한국에 와서 비무장지대의 GP까지 들어가서 북녘을 살피는 파격적인 제스추어를 펼친 바 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불렀던 레이건의 방한은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 체제를 굳히고 전두환 독재 체제의 기반을 강화한다는 것이 황정하의 판단이었다.

황정하는 부산 사람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여 ‘장군감’이라고 했던 그는 서울 치대에 합격했지만 색약임이 밝혀져 입학이 좌절된 후 재수해서 서울대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80학번이니 그 짧았던 서울의 봄도 보았을 것이고 ‘서울역 회군’도 경험했을 것이고 그 뒤 오월의 꽃바람 속에 섞인 피비린내도 경험했을 것이다. 열심히 야학 활동을 했던 그는 어느 인문계 학생 못지않은 풍부한 학습과 독서를 섭렵한 사람이었다. 폴 스위지가 쓴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영문 복사판을 양복 윗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술술 읽어댔다고 하니 말이다. (경향신문 2012년 9월 2일자.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중)


대략 이런 분위기

졸업을 앞두고 그는 마침내 시위 주동자가 될 것을 결의한다. 짭새들이 족구하고 놀고 있는 그 위로 밧줄을 비끄러매고 시간을 버는 고공농성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낮 12시 53분경, 점심을 먹은 학생들이 잔디밭에 누워 식곤을 달래다가 수업 들어가기 위해 엉덩이 털던 그 시간, 도서관 6층에서 몸집 큰 누군가가 유리창 방충망을 뜯고 모습을 드러냈다. 뭐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뒤덮는 유인물을 본 순간 사람들은 직감했다. “또 시위구나.”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이라는 유인물이 휘날리는 가운데 황정하는 방충망을 찢고 나와 밧줄을 맨 채 5층의 베란다 창틀에 발을 디디려고 했다. 이미 사복경찰과 학교 경비들은 번개같이 도서관을 뛰어올랐다. 다년간의 시위 진압 경력으로 비추어 주동자를 확보하면 일단 급한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한국일보의 첫 보도에 따르면 “관계관의 저지를 뿌리치려다가” 그리고 그 후속 보도에 따르면 “본인의 실수로” 황정하는 15미터 아래로 추락한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훤칠한 키의 황정하가 도서관 창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펼쳐졌다. 날카로운 여학생들의 비명과 남학생들의 거친 쇳소리가 뒤엉켰고 곧 땅에 떨어진 황정하는 머리가 깨진 채 피를 쿨럭쿨럭 토하고 있었다.

여기서 경찰은 또 하나의 만행을 저지른다. 그들은 황정하를 병원으로 옮기기보다는 일단 윗옷을 벗겨 황정하의 깨진 머리를 감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감출 속셈이었고 그렇게 자신의 옷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황정하를 그대로 놔 둔 채 또 하나의 시위 주동자였던 백수택을 잡는 데에만 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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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미터 위에서 땅으로 추락한 이 불운한 사람은 아무런 처치도 받지 못한 채 땅바닥에 피만 쏟고 있었다.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소생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그 참상을 목도한 학생들은 불덩이처럼 일어나 경찰에 맞선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단 말이다.” 그 서슬푸른 5공 하의 전경들 수십 명이 무장해제되기도 할만큼 그날의 시위는 치열했다.

그날 땅에 떨어진 황정하에게 달려들어 윗옷을 벗겨 그 머리를 가렸던 경찰은 당시 어떤 생각이었을까. 피 보면 애들이 흥분하니 일단 가리고 보자는 본능이었을까. 일단 얘만 가리면 시위 진압에는 문제가 없으리라는 계산이었을까.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몰라 저지른 실수였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때 경찰들은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들의 임무가 더 소중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진급이, 자신들의 고과가 더 요긴했던 것이다. 뜻밖에 일어난 불상사에서 ‘사람이 먼저’라기보다는 일단 시위부터 진압해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밥벌이였던 것이다. 누가 죽어가든 말든. 누가 피 흘리든 말든.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데 문득 이 질문의 화살촉이 오늘날의 우리를 향해 돌아올 수도 있음이 섬뜩하게 뇌리를 누른다. 30일이 넘도록 곡기를 끊고 단식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수십 일째 대법원 판결을 지키라고 황정하가 떨어진 도서관보다 훨씬 더 높은 철탑에서 농성 중인 사람들 앞에서 무심한 우리라면, 밥벌이도 해야 하고 일상도 영위해야 하니 무관심할 뿐인 우리라면, 우리는 저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득한 일제 강점기, 일제 경찰 고위 간부로서 의열단에 가담하고 폭탄 반입 등의 공작을 펼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황옥 경부 사건”의 주인공 황옥의 종손이었던, 시위 전 모든 소지품을 정리해 버려 유품이라고는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는 책 하나만 남아 있었던 청년 황정하가 1983년 11월 8일 붉디 붉은 피를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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