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007 시리즈의 팬은 아니다. 어렸을 때야 손석희가 진행하던 영화퀴즈 프로그램에서 신무기가 나오는 장면에 혹했으나, 딱 거기까지. 대학생이 되어 극장 출입이 자유로워졌을 무렵 제대로 관람하기 시작한 007은 피어슨 브로슨넌 시절이었는데, 손에 든 팝콘이 담백하게 느껴질 만큼 느끼했고, 경박한 유머도 내 취향에 부합하지 않았다.
말그대로 킬링타임 수준으로 대했던 007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건,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면서부터였다. 카지노 로열은 좋았고, 그만큼은 아니었으나 퀀텀오브솔러스도 좋았다. 그런데 엉뚱하게 샘멘더스가 차기작을 연출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인지라, 스카이폴은 보는 내내 극장에서 뛰쳐나오고 싶었다. 스크린에는 감독이 톰행크스 데리고 찍었던 홈드라마의 악몽이 재현되고 있었다. 특히, M이 청문회(였나?)에서 전통적 가치 계승, 계속 진보할 것입니다 운운하는 장면과 본드가 정장 구두 신고 무릎 나가도록 달리는 장면을 교차로 보여줄 때는 슬프도록 유치했다.
오늘 늦은 아침을 먹고 게으르게 리모콘을 조작하며 왓차를 뒤적이다 007 스펙터가 보였고 나는 잠깐 망설인 후 재생 버튼을 눌렀다. 샘 맨데스가 또 연출했기에 개봉 당시 관람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는데 오늘 변심한 이유는 단연 코로나 덕분이었다. 코로나 덕분에 여행을 못가게 되니, 영화를 통해서라도 이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에 없던 인내심이 솟아났다. 그리고 영화는 역시나 별로였다.
영화는 나이든 고아들을 한 곳에 불러모아, 서로를 향해 "너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어"라고 푸념하게 한 후, 건물을 붕괴시킨다.
임성한 수준의 홈드라마 작가에게 왜 이런 정반대의 프로젝트를 맡겼는지, 왜 그는 또 맞지 않는 옷을 굳이 입으려 했는지, 여러모로 미스터리다. 굳이 보면서 욕하는 나도 미스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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