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로 숨져 간 젊은이들 앞에서 참회하오니
1. 이것이 인간인가?
세월호 참사 이후 7년 만에 다시 터져 나온 “이게 나라냐?”하는 장탄식을 들으면서 사제들은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더욱 근원적인 물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생때같은 아이들이(2014년 4월 세월호), 그리고 꽃 같은 청춘들이(2022년 10월 이태원) 천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숨, 그저 숨 쉴 수 있도록 제발 한 번만 도와 달라!” 빌고 또 빌었건만 자기가 무엇 하는 누구인지 망각한 자들은 그게 왜 내 소관이냐며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사의 모든 비극은 비정非情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아이들은 놀러 갔다가 죽은 게 아니고, 노느라 정신이 팔린 자들 때문에 죽은 것”이라던 세월호 아버지의 절규가 떠오를 때마다 남모르게 가슴을 내려치곤 합니다. 우리 또한 직분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카인의 발뺌을 반복했을 것이며 그럴 때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상하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종종 욕망의 포로가 되어 다투고 미워하며 그 결과로 고유의 빛과 품위를 잃곤 하지만 우리는 군림할 때보다 섬기고 봉사할 때 비로소 참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음을 아는 신비로운 생명체입니다(마르 10,42 참조).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협력자요, 이웃을 어루만지는 구원자로서 이 땅에 파견된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시인이 말했듯이 모든 생명은 서로 비스듬히 기대어 살아갑니다. 기댈 데가 많은 세상이라야 안전하고 아름답습니다. 걱정 없이 아이들 키우고 노인들 모시는 사회가 되려면 자기를 내어줄 줄 아는 정신과 인격이 필요합니다. 특히 대통령처럼 공동체의 명운을 결정짓는 사람들이 지켜 주고 살려 주고 돌보는 천직을 위해 끝내는 순직할 각오까지 갖추어야 하늘도 땅도 사람도 근심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숭고한 다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최근 대통령 윤석열의 퇴진을 촉구하는 함성이 각계각층으로부터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습니다. 집권 초기부터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기이한 행실과 국정 운영으로 경제, 외교, 안보 등 국정 전반에서 나라를 위기로, 온 국민을 궁지에 빠뜨리고 있는 잘못들 때문이겠지만 사제들은 한사코 사람의 사람다움을 부정하려 드는 그의 목석같은 무정과 비정을 가장 무거운 죄로 여깁니다.
2.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자
코비드-19 감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던 지난 2020년 가톨릭교회가 다다른 결론은, 코로나 이후에는 ‘리스타트(Restart)’가 아니라 ‘리뉴(Re-new)’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는 순간 더 독하고 더 악한 코로나가 찾아올 것이라는 자각과 반성이었습니다. 사실 2017년 대한민국을 밝혔던 촛불 또한 같은 뜻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 안으로 자기를 태워 밖을 환하게 비추자는 서약이었습니다. 되는 사람만 되고, 사는 사람만 사는 그런 야속한 세상이 아니라 인생이 슬프고 세상이 막막한 사람들도 고루 잘 살게 하자는 맹세였습니다. 각자도생의 최후는 공멸이니 살아도 함께 살고 즐거워도 함께 즐거워하자는 공생공락의 뜨거운 맹세였습니다.
그런데 정부를 바꾸고 서둘러 일상을 회복하자마자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예견된 재난을 대비하지도 않았으며 참극 직전의 상황을 호소하였지만 혈세로 호의호식하는 벼슬아치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쇠로 일관하였습니다. 세간에 “남은 임기 4년 6개월이 지나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를 내리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소리가 공공연해진 것은, 권력자들의 수수방관과 뻔뻔한 책임회피의 심리 그 밑바탕에 각자도생이라는 파멸적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또 다른, 더 끔찍한 참사를 예고하는 무서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더라도 촛불혁명과 코로나, ‘그 이전과 그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물어야 합니다. '집단자살'과 '집단행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생존의 기로에서 여전히 자기중심의 생활 방식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직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만신창이가 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뼈를 깎고 살을 베는 억강부약에 기꺼이 동참하려 하는지 그 마음을 점검하라, 이것은 양심과 이성, 무엇보다 신앙의 명령입니다.
3. 진정한 조문을 위하여
윤석열의 길은 대한민국의 길이 아닙니다. 문재인의 길 역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못됩니다. 하나가 과거 회귀를 향하여 내달리다가 진창에 처박히는 곤두박질이라면(마르 5,13 참조), 다른 하나는 건너야 할 강을 건너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결국 천금 같은 기회를 탕진하고 역사적 숙원을 저버린 우유부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다 마느니 차라리 아니 하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끔히 치우고 정돈하였으나 정작 채울 것을 채우지 않고 놔두었더니 덜컥 더러운 영 하나가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더라는 말씀(마태 12,43-45)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치워야 할 것들을 치우지도 못하고, 채울 것을 채우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말끔한 청산을 이루지도 견고하고 번듯한 기틀을 세우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결과가 “깨어 보니 후진국”이라는 비탄입니다. 뼈아픈 현실이지만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참 쉽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나라도 주권도 우리 것이요, 오늘도 내일도 아이들 키우고 어른들 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급선무가 한두 가지는 아니겠으나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라면 남에게 맡기지 말고 우리가 닦아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여럿이 함께 가는 그 길에서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지 그것부터 분명하게 정합시다. 잘못 뽑아 놓고 그래서 우리 삶이 통째로 뽑혀 버리는 어이없는 실책을 다시는 범하지 않기로 합시다. 그래야만 충분히 울어 주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세월호 아이들, 영정도 위패도 없는 기괴한 조문으로 모독당하는 젊은이들의 죽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습니다.
4.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는 위령성월을 보내며
신앙인부터 더 많이, 더 자주, 더 깊이, 그래서 충분히 울도록 합시다. 울고 또 울어야 깨끗한 눈으로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고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남김없이 울어야 합니다. 끝까지 남아서 울었던 마리아가(요한 20,11 참조) 부활의 최초 목격자요 증언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합시다. 진심으로 통곡할 줄 아는 양심이라야 복음이 주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아울러 한 번 죽어서 크게 사는, 아니 자기를 바쳐야만 영원히 살게 되는 '생명의 원칙',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추락하는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신다는 '중력의 신비'를 생각하며 낙담하거나 체념하지 않도록 합시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버지, 온종일 서서 세상을 돌보시는 하느님 어머니 덕분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잘 될 것입니다. 모든 일이 결국 다 잘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의가 득세하는 때라도 기죽거나 움츠리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2022년 11월 14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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