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에서 탈출하다+1]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갈라지는 ‘시대차이’

in kr •  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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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LP를 듣기 위해 돌아가는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얹었는데, 그만 앰프에 전원을 넣는 것을 깜빡 잊었다. 스피커에 신호를 보내는 게 앰프니까, 앰프를 켜지 않았으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어디선가 내가 듣고 싶었던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두리번거리다 어디가 음악이 나오고 있는지 알았다. 바로 턴테이블 바늘에서였다.

나는 바늘이 레코드판을 ‘긁으면서’ 소리가 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소리 정보를 읽는 장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턴테이블은 진짜 바늘 끝에서 레코드판을 긁으면서 나는 소리, 그 자체를 앰프로 전달해 우리가 듣는 거라는 건 몰랐다. 그러니까 LP를 들을 때 종종 들리는 지지직 소리나 여타의 잡음은, 레코드판에 난 상처나 혹은 먼지 등을 바늘이 긁으면서 나는 ‘오류’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날로그’ 방식인 LP로는 동일한 음반을 돌려도 결코 완벽하게 똑같은 음악을 두 번 듣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언제 어떤 자리에 굵은 먼지가 내려앉아 잡음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의 예를 들어보자. 수채화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 어떤 색으로 어느 정도나 번질지 ‘예상하며’ 그린다. 숙련될수록 예측은 정확해지겠지만 결코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종이의 상태나 붓이 물감을 머금은 상태 등 변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미세한 번짐까지 완벽하게 똑같은 두 장의 수채화를 그리기란 불가능하다. 아주 비슷하게 그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말 그대로 똑같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날로그에는 언제나 다양한 변수에 의해 ‘랜덤’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디지털에는 그런 법이 없다. 디지털의 세계는 0과 1의 세계다. 솔직히 아날로그와 마찬가지로 디지털은 내게 신비의 영역이다. 어떻게 0과 1로만 이루어진 데이터가 소리가 되어 음악을 들려주고, 빛이 되어 이미지를 보여주고, 문자가 되어 지금 쓰고 있는 문서를 만들어주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주 편하게 사용은 하고 있다.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결코 불분명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 ‘노르스름한 색’이란 없다. 가장 밝은색을 1이라고 한다면, 노르스름한 색은 0.1 혹은 0.2로 정하는 것이다. 디지털의 세계는 논리의 세계이고, 0과 1의 무수한 패턴의 세계이다. 덕분에 우리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하는데 아주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세대 차이를 넘어 시대를 구분하는 차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 이후로 창의적 인간, 창의력, 창의력 발달이 크게 부각되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아날로그 시대는 ‘경험’이 곧 현명함이었다. 시대가 천천히 변한다는 건 무엇인가? 바로 지금까지 축적된 데이터에서 패턴 분석과 연구를 통해 상황을 개선할 실용적인 결과가 천천히 개발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오래 살았고, 그 일을 오래 했으며, 일과 관련된 사람을 많이 알고 있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핵심적인 인재였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일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디지털 시대는 ‘합리’가 곧 현명함이다. 브리태니커 대백과 사전이 USB 하나에 들어가고, 구글이라는 기업 하나가 인터넷의 모든 정보를 인덱싱하고 있는 세상이다.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기술을 습득하면, 새로운 정보를 얻고 이를 자체적으로 분석하고 편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경험이 없어도, 쌓여있는 데이터를 통해 패턴을 추출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대응할 수 있는 시대다. 디지털 시대에는 오히려 ‘경험’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꼭 ‘내가 해봐서 아는데’ 류 꼰대가 아니더라도, 명백한 데이터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따르는 오류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 기반 기업들이 자주 하는 것 중 A/B 테스트라는 게 있다. 광고 문구와 이미지 A안과 B안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A와 B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대표에서 임원, 실무, 광고 에이전시까지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여러 번 광고를 집행해 본 경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때로는 진짜 적합한 광고를 찾기보다 사내 파워 게임에 휘말려 결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온라인 기반 디지털 광고라면 이런 토론이 무의미하다. 소수집단을 선별해 A안과 B안을 모두 노출시켜 광고를 집행해 보고, 사람들의 반응도와 클릭률을 따져 더 반응이 좋은 광고를 집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당신의 경험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테스트 결과 나온 데이터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결정을 내리느냐가 중요하다. 토론할 시간에 데이터를 얻어서 분석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구글이 그토록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데이터가 왕’이라는 기업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글에서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길 수는 있어도, 0을 1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숫자와 데이터가 당신의 경험이나 직급, 대학 졸업장, 스펙, IQ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디지털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추가 디지털로 기울어질수록 경험은 권위를 빠르게 잃어갈 것이다. 답이 정해진 문제 풀이보다 창의력이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결코 경험한 적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경험이 대접받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변화에 ‘합리적’으로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다.


앞으로 제 커리어와 일에 관한 생각을 담았던 에세이 《출근에서 탈출하다》의 제목을 빌려, 종종 저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에세이를 써보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보팅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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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ence님 안녕하세요. 개과장 입니다. @joeuhw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저도 가이드독 님에게 리스팀을 받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

최근의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은 데이터의 집중화 플랫폼의 시대에서 데이터의 분산화 시대로 넘어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홍보해

인터넷이 진정한 디지털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블록체인과 AI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블록체인을 제대로 공부하질 않아서 탈중앙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앞으로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nice post

글이 읽는 내내 저를 빠져들게 하네요.
종종 학교에서 세대차이에 관한 주제로 에세이를 쓰곤 하는데, 전문적인 글을 읽으니 얄팍한 지식에 숨을 불어넣은거 같아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요즘은 세대차이를 넘어 세대 갈등까지 생겨나고 있는데 이런 시대의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정말 잘 쓰시는 것 같아요 :)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글이네요- ^^ 반갑습니다.앞으로도 sentence님의 생각 훔쳐보러 오겠습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
자주 들려주세요 ~

글이 읽는 내내 저를 빠져들게 하네요.
종종 학교에서 세대차이에 관한 주제로 에세이를 쓰곤 하는데, 전문적인 글을 읽으니 얄팍한 지식에 숨을 불어넣은거 같아요.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