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모비 딕>은 언젠가는 꼭 읽어야지 하면서도 늘 어딘가 두려움이 앞서 손대지 못했던 소설이다. 반미치광이 에이해브 선장이 흰고래를 쫓는다는 대강의 내용이야 알고 있지만, 두께도 두껍고, 무언가 바다를 배경으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보다는 흰고래라는 안티-유토피아(안티-이상향?)를 향한 고독한 갈망과 심리적이고 사변적인 소설일 거라는 지레짐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실제 읽어본 <모비 딕>은 완전히 딴 판이었다. 이걸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부터 의문이 든다. 처음부터 갑자기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고래 관련 문헌을 까발리는 것부터 심상치 않더니(덕질의 기본은, 덕질의 대상이 등장하는 온갖 매체를 스크랩하는 게 아니던가?), 소설 중간중간 갑자기 고래 해부학 강의를 하질 않나, 뼈가 어떻고, 머리가 어떻고, 향유고래와 참고래의 차이가 어떻고, 고래기름을 어떻게 짜내고, 이런 고래에 관한 시시콜콜한 얘기, 고래에 관한 맨스플레인을 시전하고 있었다. 허허허, 허먼 멜빌, 이 아저씨, 그러니까 고래덕후였던 것이다. 포경업이라고 그렇게 난리들 치면서 실제 고래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빈약하다니! 안 되겠다, 내가 하는 수밖에!
이슈마엘이 퀴퀘크와 만나고, 피쿼드 호에 승선하기로 하고, 배가 출항하기까지의 과정은 거의 완벽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겠다. 분위기도 훌륭하고, 퀴퀘크라는 캐릭터를 보여주기 만으로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슈마엘이 겁을 먹다가 친구가 되는 모습도 재미있다.
그런데 배가 출항하면서부터 멜빌은 고래 프로 맨스플레이너로 변신하더니, 갑자기 소설의 구조가 이상해진다. 고래를 설명하는 부분까지야 이슈마엘이 화자인 것까지는 비슷한 구성이긴 한데, 갑판 위의 상황을 갑자기 연극으로 치환해서 챕터가 희곡의 한 장면이 되어버리는 건 뭐라 할 말이 없다.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변사가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글의 형식 자체가 바뀌어 버리다니. 물론 19세기 초반이라 아직 소설의 완전한 형식이 잡히기 전 실험적인 형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형식의 통일성 측면에서 봤을 때 연극적 구성은 너무 멀리 갔다.
그렇지만 온갖 다큐멘터리 같은 구성과 희곡 구성을 제외하고 선상 장면들만 본다면, 진행 속도도 괜찮고 특히 문체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비유와 인용들이 아주 멋지다. 이런 문체만 놓고 본다면, 마치 바다 위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바닷속에서 노숙을 한다느니, 고래무리를 왕과 첩의 관계로 비유하는 등, 챕터마다 신박한 비유가 고래 물줄기처럼 뿜어져 나온다. 우리 선조들은 말이나 글을 쓸 때, 항상 고전을 인용해서 말하곤 하는데 모비 딕을 보니 왜 그러는지 조금 이해가 간다.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깊이 있어 보이게도 하며, 내가 많이 알고 있어 잘나 보이게도 하지만, 제대로 큐레이션 된 인용은 무엇보다 작품을 풍부하게 해 준다. 아무리 작가가 노력해도 자기만의 상상력으로 작품을 가득 채우면 작품의 결이, 그러니까 마치 고래 주름처럼, 독자가 해석해야 하는 작품만의 상형문자가 단조로워지고 너무 일정한 패턴을 이루기 쉽다. 적절한 인용은 마치 작은 콜라주처럼 작품의 방향을 그르치지 않으면서 작품을 풍부하게 해준다.
문제는 읽는 사람이 인용의 의미를 캐치하지 못할 때다. 이슈마엘이니 요나니 온갖 성경 텍스트로 넘쳐나는 이야기 속의 종교적 맥락을, 비기독교인이자 성경을 모르는 나 같은 인간은 파악할 수가 없다. 식인종을 그토록 품위 있게 그렸으면서, 여전히 기독교 세계관에 빠져 있다니!
지금 멜빌이 살아있다면, 지금 판본은 감독판으로 내시고, 고래 다큐멘터리 부분과 연극 부분은 대부분 삭제한 일반판을 따로 내시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사와 고래 다큐는 이질적이다. 고래 다큐를 독자가 꼭 알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혹시 <모비 딕>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분량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면, 챕터를 보면서 고래 다큐 부분은 빼고 이슈마엘의 이야기만 즐겨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저도 고래 좋아해서 고래 나오는 다큐멘터리 가끔 봅니다. 세상의 절반을 헤엄치게 하는 힘... 적도에서 새끼를 키우고 아이슬란드까지 다시 오게 하는 본능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모비딕 영화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으스스하고 소름끼치는 분위기였죠. 특히 에이허브 선장의 예언이 그대로 실행되는 부분은 ... 이게 몇년전 이야기여?? 왜 이렇게 짜임새가 좋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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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비 딕 읽고 나니까 고래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ㅎㅎ 거대한 생물은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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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정확히 서두에 써놓으신 이유로 읽기를 망설였는데.
점점 내려가면서 이거 기어이 읽어야 하나 했어요!
(세상의 모든 덕후를 사랑하는 입장으로,덕질의 기록기를 보는것도 다른 의미로 괜찮을듯 하여...)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공으로 그 두꺼운 책한권 다 읽은 기분이예요 ㅎㅎ
앞으론 모비딕 볼때마다 갈등없어 개운~ 하겠는걸요!
아참, 반갑습니당>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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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반갑습니다 ㅎㅎ 생각보다 재밌는 소설이니 재미없는 부분들 - 고래 다큐들 - 휙휙 건너 뛰면서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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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사놓은지는 몇 년 됐는데 그 압도적인 두께 때문에 한 번도 펼친적 없는 1인입니다. 전위적인 방식의 소설이군요..ㅎㅎㅎ 나중에 볼 일 있으면 말씀하신대로 고래 이야기가 장황하게 나오는 부분을 기점으로 스킵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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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책장에 있다면 망설이지 마시고 한 번 도전해 보세요. 저는 의외로 재밌어서 놀랬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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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백과사전적 지식을 펼치는 게 19세기 소설의 특징이지요.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라 원서도 사 놨는데 도무지 엄두가 안 나네요. 먼훗날 은퇴하면 봐야겠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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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까지! @kimthewriter 님도 덕후였던 거군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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