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척]3월25일

in kr •  6 years ago 

아이가 태어나서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는 요즘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스티밋을 대하는 게 예전같지 않다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고요한 저녁 시간입니다. 소식도 전하고 기록도 남기자는 뜻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3.25

오후 11시 14분, 지금 써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 글을 쓴다. 지금 써 두지 않으면, 아내의 진통이 시작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글을 쓰거나 아예 쓰지 못할 것 같다.
최근 며칠간 아내의 모든 상태는 마치 시계 초침을 움직이듯 분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다. 발은 아기발처럼 퉁퉁 부었고 배의 살 터짐은 아침저녁으로 바르는 제품으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아들의 뱃속 움직임은 눈에 띄게 굼떠졌다. 아내는 요 며칠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식욕을 보였다. 오늘은 아내가 눈에 띄게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급기야 밤엔 화장실에서 이슬을 보고 나왔다. 찾아보니 산모들은 그렇게 슬며시 피가 비친 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일주일 뒤 진통을 시작하곤 했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나기 전 고요한 가운데 마지막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정말 나올 준비를 하는 것 같구나. 오늘 엄마 뱃속에서 크게 꿈틀 했는데, 이제 나와야 하니 움직임을 멈추기 전 마지막 용틀임 같기도 했어. 네가 나오면 아빠가 많은 말을 해 주겠지만, 그전에 지금 기분으로 글을 써 두고 싶어.

아들아.
너는 엄마, 아빠가 간절히 기다렸던 아이다. 네가 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너무나 감사했고, 오히려 이 행복이 혹시나 달아날까 봐 한 동안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네가 엄마, 아빠한테 와 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고 감사했어. 아빠는 엄마가 임신 테스터를 들고 화장실에서 나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네가 태어나는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너는 열 달 동안 다른 수많은 산모와 아기들이 겪는 숱한 고비를 엄마와 함께 아무 탈 없이 넘겨 왔다. 한 번도 탈이 나거나 걱정을 시키지 않았어. 너는 엄마들이 맘을 졸이는 모든 검사들을 무사히 통과해 줬다. 때가 되면 그때에 맞는 현상을 보여줬고 건강하게 잘 커줬다. 엄마 아빠는 임신 기간 동안 참 별 걱정이 없었다.
아빠는 엄마 뱃속에서 말없이 꿈틀거리고 통통거리는 너를 느끼면서 너무 행복했다. 아빠 부름에 대답하듯 꼬물거렸을 때 아빠는 주저앉아 운 적도 있어. 앞으로 너를 키우면서 겪을 모든 역경에 대해 이미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다.

열 달 동안 아빠는 참 행복했다. 너를 임신한 엄마를 위해 밥을 지을 수 있어서, 엄마가 맛있게 먹어 줘서 행복했어. 밥을 먹은 뒤엔 네가 어김없이 즐거운 듯 움직이는 걸 느끼곤 기뻐했다. 엄마를 한 번도 병원에 혼자 가지 않게 해서 뿌듯하고, 엄마가 너를 뱃속에 담은 채 크게 걱정하거나 놀라거나 슬퍼하고 화내지 않도록 해 왔다는 게 자랑스럽다. 네가 나와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면, 네가 보이지 않고 말도 없는 조그만 생명체였던 시간은 끝나겠지. 아빤 그 시간을 사랑하고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하다.

아들아.
열 달 동안 건강하게 쑥쑥 크느라, 두 시간 간격으로 자고 깨며 엄마 아빠 부름에 답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지? 이제 엄마랑 조금만 힘내서 건강하게 나와주렴. 그게 아빠가 너한테 간절히 바라는 단 하나다. 그리고 혹시 아빠가 네 이름을 부르면 알아봐 주겠니? 아빠는 앞으로 어떻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못할 것 같아. 해주고 싶은 것도 같이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거든.

아들. 열 달 동안 너무 많이 고마웠어. 이제 건강하게 만나자. 사랑한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득남을 축하드립니다.
글 읽으며 저도 울컥하네요.

고맙습니다. 한달 지났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네가 태어난 날 온 세상이 너의 이름을 속삭였단다. 아가야. 너는 멋진 부모님을 두었고, 세상을 천천히 배워나가겠지. 언제나 꽃길만 걷자, 이런 말을 해 주진 못하겠구나. 삶이 그러지 못함을 알기에 - 다만 어떠한 길을 걷더라도 우리 모두는 네가 행복하기를 기도한단다. 행복하거라 -아멘.

눈물나게 왜 그래요

축하드립니다. 스팀잇에 신경쓰실 수 없는 것도 당연하죠 ㅎㅎ

ㅋㅋㅋ 좀 덜 공개된 곳에 혼자 글을 쓰고 있는데, 거기도 글을 못 쓰네요..

득남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스팀잇이 예전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주자주 소식 전해주세요.
아마도 육아로 더 바빠지시겠지만요...

네 요즘 살이 쪽쪽 빠지네요. 종종 들르려고 합니다.

많이 많이 축하드립니다.
나무라도 한 그루 심어시길^^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근데 나무까지 키우려면...

정말 오랫만에 들어오셨네요.
스팀잇 할 정신도 없으실 듯합니다.ㅎㅎ
득남 축하 드립니다!!!!

출근할 정신도 없네요? ㅋㅋㅋㅋ

Congratulations @shiho! You received a personal award!

Happy Birthday! - You are on the Steem blockchain for 2 years!

You can view your badges on your Steem Board and compare to others on the Steem Ranking

Vote for @Steemitboard as a witness to get one more award and increased upv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