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아닌 척]한 번 써 보는 군대 이야기-(1)훈련소

in kr •  7 years ago  (edited)

제대 뒤 이제껏 군대 얘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여성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라서가 아니다. 나는 축구도 안 했다. 내 군생활은 다른 군필자들 사이에서 공감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그냥 써 본다. 여기에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고 기자인 척 하기가 싫어서도 아니다. 어쨌든 간에 이놈의 군대 얘기를 그나마 흥미롭게 읽히게 하기 위해 나는 남들처럼 뻥을 좀 섞어서 많은 '초(예:초를 치다=양념을 치다)'를 동원할 예정이다.


스물두살의 패기는, 앞으로 닥칠 일을 모를수록 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입대를 앞두고 입버릇처럼 "훈련이나 근무는 엄청 빡세고 대신 집에 자주 보내주는 곳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겉멋이 60%는 차지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곳에 가게 됐다. 후회하진 않는다. 2년 동안 정말 원없이 집에 나왔다.

논산 훈련소에서 나오지 않는 X을 밀어내다 포기하고 밀어내다 포기하며 장 안에 온갖 적폐를 쌓아두던 어느날이었다. 아아 훈련소의 휴지는 왜 그리 까끌까끌하며, 군대에서는 대체 뭘 먹이기에 이렇게 다들 화장실만 가면 다리에 쥐가 나도록 앉아 있어도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는 거였을까. 혹자는 맛나게 피우던 담배를 못 피워서 그렇다는데, 나는 당시 비흡연이었으나 남들과 똑같이 뱃속에 적폐를 끌어안게 됐다. 낯선 곳에서 먹고자는 스트레스, 제 때에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타이밍의 문제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X얘기는 이쯤 해 두자. 여하간 어느날 막사 내 방송에서 나를 포함한 수십명의 이름을 부르며 대대식당으로 튀어오라는 것이었다.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내무실에서, 화장실에서 빡빡머리 훈련병들이 튀어나와 대대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식당에 가니 웬 작달막한 아저씨와 싸움 잘하게 생긴 몸매를 가진 형이 얼룩무늬 군복에 이상한 민무늬 잠바떼기를 입고 검나게 폼을 잡고 서 있었다. 싸움 잘하게 생긴 몸매의 형은 실내에서 선글라스까지 쓰고 주먹을 꽉 쥐고 차렷자세로 서 있었다.

방송으로 부른 수십명이 전부 집합을 끝내자 선글라스 쓴 형이 코팅된 인쇄물을 나눠줬다. '유엔사 경비대대'라는 제목이었고, 뭔진 모르겠지만 대대식당에 있는 형, 아저씨랑 비슷한 옷차림을 한 군인이 선글라스를 쓰고 이상한 자세로 이상한 가건물 같은 것 옆에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거기에 무슨 최전방이니 판문점이니 대성동이니 하는 말이 적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냐면 맨 밑에 '5일 근무-5일 훈련-5일 정비(외박)'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여 있던 훈련병들 눈 돌아가는 소리가, 같이 눈 돌아가고 있는 나에게까지 들렸다. '이런 미친 이런 군대가 어딨나 이런 식이면 나라는 언제 지켜 너무나 감사합니다.'

선글라스 형님이 무슨 신상명세 양식을 나눠줬고 (항상 볼펜을 휴대하고 있는) 훈련병들은 검나 열심히 그걸 채웠다. 최전방이고 나발이고 한달에 두번씩 집에 갈 수 있다니 대학입시 원서를 쓸 때보다 더 열심히 신상명세를 적었다. 770점 밖에 안 되던 토익 점수도 적어 넣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느낌이었다.

신상명세를 걷어간 두 사람은 그 때부터 데스노트의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다. 시력을 1.0 이하로 적어 낸 훈련병들이 막사로 돌아갔다. 키가 175cm 밑인 사람들이 또 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을 죽 세우더니 '오다리'를 돌려보냈다. 그런데도 사람이 너무 많았는지 이번엔 키를 180으로 높여서 다시 걸러냈다. 내 키는 181cm다. 머리가 커서 178 정도로 보인다고들 하지만, 분명히 181cm다. 그래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래도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직 더 잘라야 하나보다. 이번엔 푸시업을 시켰다. 푸시업을 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되는데 걍 죽어라고 했다. 잘 안 올라가던 두어명이 또 나가리가 됐다.

나를 포함 최종 5명이 추려지자, 드디어 선글라스 형아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모두가 최종선발된 것은 아니다. 너희 모두 갈 수도 있고 일부는 남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와나 또 떨어질 수 있다니... 그 뒤로 다른 매력적인 곳으로 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유엔사 경비대대에 가기로 돼 있는 사람은 다른 데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된장. 최종합격도 확보 못한 채로 다른 데 지원도 못하고 찌그러져 있었다.

근데 정말 훈련병 기간이 끝난 뒤에 한 명이 또 떨어졌다. 다행히 나는 아니었다. 떨어진 놈은 다른 곳에 갈 기회가 남아있지 않아 논산에 남아야 한다고 했다. 논산에서 남은 보직은 박격포 뿐이라고 했다. 제대한 뒤에 이곳저곳의 군생활을 들어본 결과 박격포는 검나 무거운 걸 검나 들고 다녀야 하는 최악의 보직 중 하나였다. 그 동기는 천국에 발을 걸쳤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격.

훈련소를 퇴소하고 군열차를 타고 나와서 영등포인가 의정부인가에서 인솔하러 나온 그 선그라스 형아를 만났다. 우리 중 누군가는 반가운 마음에 실실 웃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말없이 우리를 인솔해서 자신이 타고 온 미니버스에 태웠다. 버스 문이 닫히자 마자 선그라스 형아는 낮은,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려. 시선은 상방 15도. 고개 돌리지 않는다. 손은 주먹쥐고 무릎에 올려. 등허리 의자에 대면 죽여버린다. 이 신발색기들이 미쳤나 어디 이빨 보이고 쳐 웃냐. 들어가서 보자."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ㅋㅋㅋㅋㅋ 재미있네요. 저도 약간 비슷한 경험이. 군대얘기, 싸움얘기 등은 정말 더 이상 포스팅할게 없겠다 싶을때 써먹으려고 쟁여두고 있답니다. 연재 기다리겠습니다 ㅎ

ㅋㅋㅋㅋ 저도 사실 머쓸까 하다가 ㅋㅋㅋ 제대까지 함 써볼게요 ㅋ

ㅋㅋㅋ
그래도 자대 보다는 훈련소가 제일 편했어요
모두 동기들 이라서 ㅎ

그렇죠. 훈련소가 천국이었죠. ㅋㅋ

군필자들 소환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다들 할말이 글로만 이어도 연병장 두바퀴는 나올텐데 군대 수기로 공모해도 꽤나 재밌겠네요 ㅋㅋ

연병장 두바퀴 ㅋㅋ 공공의적에 나오는 대사인데 ㅋㅋㅋ 제가 선빵한 건가요

네 그런것 같습니다 ㅋㄱㅋㅋ

유엔사라니 겁나 멋져보이는데를 다녀오셨네요

지금은 3군사령부 소속이 돼버렸지요 ㅋㅋ 1사단의 보급을 나눠먹는..

하...입대가 얼마 남지 않은 저에겐 그저 재밌지만은 않습니다ㅠㅜ

음... 아락실을 챙겨 가셔요..

ㅎㅎㅎ 재미있네요. 군대얘기 재미없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ㅎㅎㅎ 초를 쳐서 재미있나? ^^

초는 기자의 생명이죠!

이병헌이 출연한 JSA에서 보여주던 모습
일단 보기에는 엄청 멋있었지요.
나중에는 어떠셨는지 몰라도
아마 그 당시에는 썬글라스 형아가 훈련병들의 눈엔
맥아더장군보다 더 멋있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재미있어요. 군대얘기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