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원령공주(1997)上편

in kr •  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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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포스팅에 앞서서.. 저에게 감사하게도 대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kyunga님이 올려주신 두 개의 이미지가 모두 좋아서 영화 리뷰 포스팅에는 첫 번째 이미지를, 그 외의 포스팅에는 두 번째 이미지를 사용하기로 정했습니다. 다시 한 번 저에게 대문을 추천해주신 @bramd님과 대문을 만들어주신 @kyuna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주의: 본 포스팅은 [원령공주]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령공주OST- Ashitaka Sekki
Sekki는 욕이 아니라 일본어로 ‘전기’라는 뜻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계기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브리 스튜디오를 창립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는 이 시기를 장식했던 지브리의 초창기 작품들이었다. 특히 [이웃집 토토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필모그래피에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일각의 비판을 깨부순 애니메이션이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영화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완하기 위해 만화판의 완성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만화판이 완성된 시기가 1994년경이었다.

이쯤부터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든 기술적 역량을 발휘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한 층 더 발전시킨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마침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함께했던 스즈키 토시오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마지막 역작을 만들어보자고 하야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생 역작으로 남겨질 이 영화가 과연 ‘어떤 메시지를 남기는 영화로 만들어질 것인가’였다. 이 무렵 미야자키 하야오는 현시대가 직면한 문제는 결코 기성세대가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다. 일본거품 경제의 붕괴로 인한 기이한 범죄증가, 동구 공산권의 몰락, IT혁명 등으로 당시 일본은 환희와 분노가 뒤섞여있는 혼란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이 IT열풍과 가요계의 르네상스, IMF를 같이 겪은 것만 봐도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그는 그동안의 작품과는 달리 메시지 자체를 아예 없애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선과 악이 뒤엉킨 시대. 어디서부터 옳고 그른 것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어진 시대. 인간과 자연,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엽기적 행각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급기야는 살육까지 벌어지는 시대. 그런 시대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비추려면 더 이상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는 메시지보다는, 관객이 직접 메시지를 만들어나가는 애니메이션이 필요했다.

이런 일련의 고민 속에서 나온 영화가 제작기간 3년에 200억 원의 예산이 들었던 [원령공주(1997)]였다. 주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이어져왔던 ‘인간과 자연’이었다.

Act1 자연의 분노

무로마치 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 시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떤 한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멧돼지 형태의 재앙신이 주인공 아시타카의 팔에 저주를 내리고 죽게 된다. 다음과 같은 대사와 함께.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는 자연의 증오와 한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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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무녀는 저주를 풀기 위해 서쪽으로 가야한다며 아시타카에게 마을을 떠날 것을 조언한다. 아시타카는 짧은 여정 끝에 오른 팔 저주의 원인이었던 서쪽 타타르 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Act2 타타라 마을

타타라 마을에서 아시타카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다. 우선 배경이 무로마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타타라 마을의 한 남성이 ‘우리가 쌀을 구해오니까 너희 여자들이 먹고 사는 것’이라고 말하자, 반대쪽 여성이 ‘철을 만들어서 그 쌀을 살 돈을 만드는 건 우리다’라며 맞받아치는 것에서 이런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마녀배달부 키키]에 이어 하야오 감독표 1세대 페미니즘 향수가 느껴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는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일부러 여성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회의도 여성 애니메이터들을 중심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땐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진취적인 여성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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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타타르 마을의 사람들은 남녀구분 없이 그들의 우두머리인 에보시를 신뢰하고 있었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마을을 가꾸어나가다가 숲의 짐승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바람에 위기에 빠졌었는데, 그 순간 에보시가 병력을 이끌고 자신들을 구원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시타카는 처음에 그런 말을 듣고 에보시를 증오하게 된다.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저앙신의 몸에서 나온 물체가 에보시의 탄환이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즉, 에보시가 멧돼지를 재앙신으로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보시는 굴하지 않고 타타르 마을의 번영을 위해 자연과의 전쟁을 지속해나가겠다는 뜻을 아시타카 앞에서 내비친다. 그것도 자연을 죽이는 도구를 만드는 곳인 화승총 제작소 안에서 말이다. 당연히 아시타카의 입장에서는 화가 치밀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때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누워있던 정체불명의 남자가 다음과 같은 말로 아시타카를 타이른다.

나도 저주받은 몸이라 자네 분노와 슬픔은 잘 알겠네. 허나 저 분을 죽이진 말게. 우릴 인간 대접하는 유일한 분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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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타타르 마을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화승총을 만드는 일은 전부 문둥병 환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시타카에게 말을 건 남자는 문둥병 환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에보시가 사회의 약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면서 그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토르메키아 왕국의 크샤나가 속국 사람들을 착취하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행동은 두 인물 모두 같지만, 에보시에게 있어 그 목적은 타타르 마을 구성원 전부가 상생(相生)하며 발전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보시는 전통적인 악역과는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무로마치 시대에 여성과 문둥병 환자까지 끌어안으면서 순수히 마을사람들을 위해 숲과 전쟁을 벌인다는 인물을 더 이상 단순한 악역으로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처럼 에보시라는 인물을 통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한 층 더 발전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Act3 원령공주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음에도 자연파괴를 정당화시키는 에보시의 모습을 선하다고 할 수도 없다. 목적이 올바를지라도 수단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에보시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산(원령공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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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을 때부터 숲에 버려져 들개에게 키워진 산에게 있어, 인간들은 혐오의 대상 그 자체다. 그는 인간인데도 인간에게 버려졌고 오히려 에보시가 없애려는 숲의 들개에게 은혜를 입으며 자라났다. 에보시에게 숲이 마을의 번영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라면, 산에게 있어 숲은 부모와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작중에서 산이 원숭이들에게 ‘자연이 죽어도 넌 인간이라 살아남는다’는 말을 듣는 걸 보면 그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도하다.

그러면 이제 영화의 메시지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에보시는 자연을 파괴하지만, 그 목적이 악의적이지 않다는 것.
산은 인간에게 버려져 인간을 증오하지만, 그 자신의 존재가 결국 인간이라는 것.

영화 속에서 이 모순을 풀어나가는 존재는 아시타카다. 여느 때처럼 마을을 습격해서 에보시의 목을 노리고 덤비는 산에게 아시타카가 나타난다. 그리고 재앙신의 마음과 타타르 마을의 모습을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 싸우고 있는 둘을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중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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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속에는 요괴가 있소. 이 소녀도 마찬가지요. 다들 보시오! 이것이 내 속의 원한과 증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썩게 하고 죽음을 부르는 저주요. 더 이상 증오에 휩쓸리지 마시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작품에서 가장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말이라 할 수 있겠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일방적 결말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분명 그에게 ‘자연은 무조건 옳고 인간은 무조건 나쁘게 그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혔을 터였다. 그리고 그 사고는 당연히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라는 경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결국 그에 대한 대답으로 원론적이지만 ‘자연과 인간이 서로 증오를 멈춰야한다’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의 결말을 끝맺어버리면 아무래도 많은 빈틈이 보일 수밖에 없다. 증오를 멈춰야한다는 말은 좋은데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하는지, 혹은 증오를 풀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장치가 없다면 영화의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고 말 것이다. 다행히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로운 제3의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이 결점을 극복해낸다. 이 존재가 바로 다음 포스팅에 이야기할 ‘사슴신’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시리즈

미야자키 하야오, 그는 누구인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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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심층분석이네요^^
저번에 이어 잘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거려요 ㅎㅎ
근데
대문이 넘 멋집니다

일본에서 개봉된지 20년이 지난 영화이니 가물거릴법 합니다. 대문 너무 멋지죠? ㅎㅎ

이렇게 멋진 글에 쓰이다니 영광이네요!ㅎ
저도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중에 기억에 남는 작품은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세 가지 인거 같아요. 그 중에서 이 작품은 신비로움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풀어주신 이야기를 읽고 나니 다시금 보고싶어지네요..!
제라피님, 사슴신 이야기도 기대할께요!ㅎ

제가 더 영광입니다 경아님! 다시 봐도 분명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일 거예요 ㅎㅎ

제 기억으로 당시 허리우드 영화에서 일본을 지킨 영화죠

다시 찾아서 복습해 봐야겠네요

그리워라 코난

무려 363일간 일본 극장에서 롱런한 영화였죠:)

i want join you

오호 좋은 대문이 생기셨네요~! 멋집니다~!
원령공주는 못봤던 애니메이션입니다.
개봉된지 20년이나 지났다니 후덜덜..
이번 주말은 여유 있을 예정이니 시청해야겠네요~!

오래됐죠..ㅎㅎ 시간이 참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