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름 없는 캐릭터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왜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거 보면 주연급 역할도 아닌데 대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비중 낮았던 캐릭터들 있지 않나. 신기하게 그런 캐릭터들은 나중에 항상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재평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그런 캐릭터를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였고. 대표적으로 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드래곤볼이라는 애니매이션의 인조인간 16호가 그랬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캐릭터들을 왜 좋아했나 생각해보면, 강하지 않은데도 용기 있는 행동을 하는데서 오는 역설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악을 물리치든 못물리치든, 주인공 캐릭터보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저항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통쾌함과 감동을 선사한다. 그래서 각종 창작물에서 이런 종류의 캐릭터는 아름답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설령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오히려 악에게 당하는 결과로 이어진다하더라도, 다른 캐릭터를 각성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여 스토리를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창작물의 세계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건 현실의 악이 창작물의 악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현실의 악이 생각보다 1차원적이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현실의 선이 마냥 올곧은 존재는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현실의 이런 복합적인 선악구조를 가볍게 보이지만 중량감 있게 잘 그려냈다. 영화에서 서울의 택시운전사 김만섭은 80년을 살아가는 평범한 아저씨 그 자체로 등장한다. 정치에는 딱히 관심이 없고 젊은이들의 데모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보며 ‘사우디 가서 일 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나란데 공부는 안하고 데모야.’ 라며 혼잣말을 내뱉기도 하고, 딸을 위해 밀린 사글세를 갚으려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밀린 사글세를 한 방에 갚을 방법을 우연히 듣게 된다.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외국인을 광주로 데려다주면 택시비 1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만섭은 이게 웬 횡재냐를 외치며 신나게 광주를 향하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들이 걱정된다는 할머니를 택시에 태우고 광주의 병원에 도착했더니 중상자들이 넘쳐나 있었고, 계엄군이 시민을 곤봉으로 무차별구타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는 이런 광주의 참상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만, 여전히 택시비만 받고 서울로 서둘러 가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도저히 올곧고 선한 캐릭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들이다.
그런 그가 바뀌게 되는 원인은 거기에 있던 이름 없는 영웅들 때문이었다. 정황상 전혀 사명감 없이 택시비만 받고자 들어왔던 만섭은 이름 모를 광주 사람들의 도움으로 기름을 공짜로 채우고, 고장 난 차량의 부품을 대가성 없이 교체 받는다. 그런 그들의 진정성과 인정으로 만섭은 안보였던 현실을 점점 마주하게 된다.
이 영화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지는 만섭의 행동변화이다. 재식이가 진실의 전파를 위해 위르겐과 만섭을 대신하여 희생한 그날, 광주의 택시운전사였던 황태술(유해진)의 집으로 돌아와 새벽 내내 흐느껴 울던 만섭은 동이 트자마자 홀로 광주를 떠난다. 그에게는 엄마 없이 홀로 집에 있는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의 참상을 이미 목격한 그는 고민 끝에 광주로 다시 엑셀을 밟는다. 그의 하나뿐인 우선순위 가족이, 진실을 위한 용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반면 두 번째 하이라이트는 만섭의 용기가 아닌 극중에 나오는 박중사(엄태구)의 용기를 꼽고 싶다. 광주의 모든 길목이 봉쇄된 상황에서 만섭은 위르겐과 목숨을 걸고 검문을 돌파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해당 길목을 책임지던 분대장은 다름 아닌 박중사였다. 박중사는 트렁크 안에서 만섭을 보내지 않아야할 결정적 증거, 서울지역으로 새겨진 차량번호판을 찾아내지만 못 본 척 그냥 통과시켜주는 행동을 한다.
사실 현실에서 옳은 일을 위해 저항하기 가장 힘든 경우 중 하나는 권위자의 세뇌로 인해 자신을 제외한 구성원이 전부 yes를 외치는 경우일 것이다. 밀그램, 짐바르도의 복종실험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80년 당시의 계엄군은 고강도의 정신교육과 훈련으로 그런 광기가 더욱 심하게 발현되었을 거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박중사가 보여준 용기는 또 다른 형태의 이름 없는 영웅이라 할 수 있음과 동시에 현실의 악이 1차원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세 번째 하이라이트는 만섭이 자신의 이름을 메모지에 김사복으로 적어주며 위르겐에게 건네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그의 신분을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그런 것도 있겠으나, 그보다 더 무거운 의미는 그 스스로 혜택 받는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라 본다. 광주를 떠나기 전, 황태술이 주는 돈에 대해 ‘제가 이걸 어떻게 받습니까’라고 하며 거절하는 모습에서도 이 부채의식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부채의식을 느끼는 시점부터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만섭에 대한 활약상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진짜이름을 사복이라는 가짜이름으로 지워내면서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 없는 영웅이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별 볼일 없는 소시민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80년의 광주는 그런 평범해보였던 사람들이 영웅의 모습으로 사라져갔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위르겐처럼 외부에 진실을 알리기 위해 뛰었으며 어떤 사람은 피를 흘리며 방황하는 청년에게 숨을 보금자리를 빌려주기도 했고, 길거리에 나체로 있는 여성에게 계엄군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담요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그저 계엄군에 벌벌 떨거나 김만섭처럼 현실의 벽 앞에 갈등하다가 마침내 두려움을 극복하고 진실에 나아가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잊혀 지지 않고 정확히 7년 뒤 문익환의 연설에 광주 2천여 영령으로 정확히 묘사되어 나왔다.
오늘의 역사는 그런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 위에서 만들어진 역사다. 평범한 영웅들의 이야기. 그 영웅들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처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현실 앞에 갈등하는 만섭의 모습처럼. 때로는 진실을 향해 드라이브했던 만섭의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