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다. 글 쓰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란 걸.
수업을 하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다. 글만으로 밥벌이가 턱없이 안 되어 시작한 일이다. 하지만 수업은 밥벌이‘만’을 위한 일은 아니다. 그랬다면 다른 일을 하면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선생을 자처하는 일이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글을 쓰는 것이고, 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이다. 할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이야기니까. 그렇다. 수업은 글을 쓴 사람의 최소한의 의무이기도 하다. 글이 아닌 말이 필요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수업은 수업이다. 다른 방식의 수업을 추구한다느니, 권위주의를 벗어난 수업을 한다느니 해도, 결국 가장 많이 떠드는 건 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듣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를 쓴다. 학생들의 이야기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 질문 속에는 저마다의 삶의 서사들이 담겨 있다. 용기를 내는 분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렇지 못한 분은 슬며시 돌려 이야기 할뿐이다. 다들 질문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제 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무거운 ‘돌멩이’ 하나 얹고 산다는 걸. 우리는 너무 쉽게 예단한다. “내 가슴에 얹힌 돌은 바위야!” “네 가슴에 얹힌 돌은 자갈이야!” 다 돌멩이일 뿐이다. 자갈보다는 무겁고, 바위보다는 가벼운. 각자의 가슴에 얹힌 돌이 자갈이었다면 벌써 털고 일어나버렸을 테고, 바위였다면 이미 짓눌려 버렸을 테니까. 그 돌멩이는 누가 들어줄 수도 없고, 들어주어서도 안 된다. 시간이 걸려도 힘이 들어도 자신이 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제 안다. 선생의 역할을. 그건 돌멩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네가 가슴 위를 누르고 있는 건 자갈이 아니라 돌멩이야” “네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건 바위가 아니라 돌멩이야”라고 말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역할이 있다. 그건 기다려 주는 일이다. 저 마다의 돌멩이를 직면하기를, 또 그 돌멩이를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올리기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일이다. 많은 오해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기다려 주는 일.
이제 안다. 글 쓰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이란 걸. 유리병 편지를 띄워놓고 기다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