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감당하기 싫어서. 나는 긴 시간 죽음으로 도망치는 삶을 갈망해왔다. 이 얼마나 비루한 삶인가. 그것이 비루한 삶임을 알게 된 순간, 수치스러워졌다. 좋아하는 철학자는 생의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베란다로 기어가 투신했다. 그는 살아있는 채로 죽었다. 그 죽음 앞에 나는 수치스러웠다. 죽어 있는 채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발버둥을 쳤다. 살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죽어 있는 채로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철학을 공부하며, 글을 쓰며, 득실거리는 타자와 조우하며 삶을 버텨냈다. 그렇게 나는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이제 내게 죽음은 도피처가 아니라 돌파구가 되었다. 언젠가 다가올 죽음 앞에 비루해지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으니까. 강건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하는 지금의 나는, 삶을 긍정하고 있다.
누가 허락해주지도, 또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걸. 그렇게 나는 글을 쓰고, 수업을 하고 있다. 나는 한 동안, 어쩌면 지금도 나 자신을 ‘선생’으로, 나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제자’로 말하지 못했다. 주제 넘는 짓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나 역시 아직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함부로 나를 ‘선생’으로, 내게 배우러 오는 이들을 ‘제자’라 말하지 못했다.
내가 ‘선생’임을 자임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뿐일까? 아니다.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내게 배웠던 이들 중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배웠던 많은 이들 중 대부분은 늘 그 자리에 머물렀다. “나는 겨우 내 삶 하나 긍정하게 되었을 뿐, 그네들의 삶을 긍정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뼈저린 사실의 확인이, 나를 ‘선생’으로 자임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는 ‘선생’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보다 훌륭한 ‘제자’들 덕분이다. 자신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에 직장을 박차고 나온 제자. 나의 가르침을 믿고 직장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제자. 야박한 다그침에도 포기하지 않고 링에서 끝까지 맞서 싸운 제자. 수업을 듣고 자신만의 평정심으로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제자. 불타버린 아버지 작업장 앞에서도 담담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제자. 그리고 나를 믿고 자신의 삶을 밀어붙이고 있는 그 모든 제자들.
그렇게 훌쩍 커버린 ‘제자’들 덕분에, 나는 ‘선생’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를 ‘선생’으로 만들어준 그 사랑스러운 ‘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고마움은 나를 ‘선생’으로 만들어주어서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나를 ‘선생’으로 만들어준 ‘제자’들은 더 이상 ‘제자’가 아니다. 대견하고 기특하게도, 제자라고 하기엔, 이미 훌쩍 커버렸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네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어찌 그 사랑스러운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귀가에 ‘이탁오’의 이야기가 귀가에 맴돈다.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