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열폭기 #2 이 망할 놈의 R&R

in kr •  6 years ago 

오늘도 어김없이 오르는 혈압을 주체하지 못해 뒷 목을 부여잡고 열은 받지만 차마 들이받지 못한 채 퇴근 후 술자리의 하소연과 뒷담화로 열린 뚜껑을 닫는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마법같은 단 한마디이다.


"그건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그렇다면 외치고 싶다... '그럼 이 일은 대체 누가 하냐!'

모든 회사나 조직엔 업무에 대한 R&R이란 것이 존재한다. 각 부서나 담당자의 업무 범위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의함으로써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작던 크던 동호회든 회사든 군대든 다양한 조직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느낀 바는 대부분의 조직 내의 갈등은 이 R&R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조직을 하나의 자동차라고 봤을 때 각 부품의 역할과 범위 성능이 명확하지 않다면 자동차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걸 자동차로 정의를 할 수는 있을지 본질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소비자는 불안해서 그 자동차를 구매하지도 않을 것은 당연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R&R이 명확하지 않은 회사는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객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만큼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모든 조직은 각 부서의 이 R&R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인지라 이 명확한 규정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에 대해선 R&R이 없는 경우가 많은 데 이럴 때그 업무에 발을 들이는 순간 혼돈의 카오스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업무 중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해서 관계 부서에 찾아가면 담당자는 이내 '그건 제일이 아닌데요'를 시전한다. 그럼 이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지를 물으면 몇몇 관계 부서를 이야기해준다. 미루는 것이다.

그러면 당사자는 부평초 처럼 그 부서들을 쫓아다니며 문제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 어느 부서에서도 자기 일이라고 인정하는 직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직원은 천지에 산다는 괴수처럼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인정은 커녕 오히려 왜 우리한테 묻냐며 불만스런 태도를 보이지만 않아도 감사하다.

결국 당사자는 본인이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결국 나중에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면 어이없게도 그 문제의 담당자로 낙인찍히곤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당사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의 규정과 전문적인 지식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결국 관련 부서의 담당자들에게 실무적인 문의를 하게 된다. 그 때는 일전에는 자기 일이 아니라며 두 손을 들었던 그 부서가 결국 키를 쥐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부서가 담당 부서 또는 협조 부서가 되는 것이고 그 업무에 책임이 있었음을 반추할 수 있다.

그리고 담당자의 의견을 구할 때는 어찌나 본인들의 경험과 지식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이것도 모르냐는 눈치를 주는지 눈꼴이 시지만 그럼에도 당사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도 절대 그 업무를 본인들이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심히 하라고 고생한다고 응원을 해준다. 이건 마치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대신 운전시키며 격려하는 꼴 아닌가. 그 순간만큼은 마치 오른손에 잠든 흑염룡의 기운이 깨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서로 일을 미루는 각 부서 담당자들을 모아서 삼자대면을 시킨 적이 있다. 그러자 놀라운 상황이 발생했다. 각 부서의 (모두 최소 과장 이상인)담당자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절대 트집 잡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제3의 방법을 찾아 내더니 그 방법을 나에게 미루며 시간을 벌었다. 결국 그 자리에 없는 다른 부서의 책임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창의적일 수가!! 정말 정반합의 신묘한 원리를 이해한 날이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그 작태를 보며 기가 차서 그 업무 진행을 포기해 버렸다.

이런 경우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대체로 담당자가 그 업무를 오래 해왔고 연차나 직급이 조금 있는 경우 특히 많이 발생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하여 현란한 혀놀림으로 상대방을 정신 못차리게 한 후 직급과 나이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통해 업무를 미뤄버린다. 이건 겪어본 사람만 아는 백전불패의 전략인지라 알면서도 속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 뒷동산에 올라가 때릴 수도 없고 말이다.

두 번째 경우는 사실 좀 다르다. 이건 정말 회사에 R&R이 없는 경우이다. 회사가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신규 사업을 할 때 종종 발생한다.

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사람이 해야 한다. 그저 필요할 때 관계 부서의 협조를 구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매듭을 짓는 것은 필요한 사람의 몫이다. 그렇게 일이 한 사이클을 돌고 전체적인 프로세스가 정리되고 나면 조직은 변화된 상황에 맞게 R&R을 조정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적합한 담당자가 정해지게 된다.

이건 나름 이해할 수 있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급변하는 상황을 항상 즉각 대응하기는 힘들고 새로운 사업의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란 실질적으론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 않는 '조직원들의 자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아쉬운 사람이야 적극적이로 임하지만 관계 부서 담당자들은 새로운 일은 자신도 없고 잘 모르고 하다보니 소극적으로 응대하고 행여나 실수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방어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새로운 업무일수록 도전적인 태도와 적극적인 자세가 정말 필요하건만 담당자들은 온갖 이유를 갖다 붙히며 안 되는 이유는 설명하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되게 만들 수 있을지를 물으면 '아 몰랑~'을 시전해 버리곤 한다.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 그리고 업무 회피력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글 첫머리에 이야기한 멘트를 날리기 시작하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누구나 일이 바쁘고 허덕인다. 또한 누구나 새로운 일을 더 떠 않기 싫다. 누구나 지금 바쁜데 갑작스레 새로운 일을 가져오면 싫다. 하지만 월급을 받았으면 그런 일을 감수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업무를 튕기면 대체 우리는 어디 기대란 말인가.

오늘도 '그건 제 담당이 아닌데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를 내뱉는 주둥아리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퇴근길 버스 안에서 분함을 곱씹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래도 어찌하리. 요즘 같은 세상에 성질 부려봐야 당사자만 손해인 것을. 살살 달래던가 그게 아니꼬우면 그냥 내가 하던가, 둘 중 하나 인것을...

가끔 한 번씩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명쾌한 답변을 주는 관계 부서 담당자들이 있어 그래도 회사는 굴러가고 실무자는 다시 한 번 힘을 낸다.

마음 속 깊이 언젠가 내게도 다가올 그 순간을 기다리며 말이다.


"그건 제 일이 아닌데요!"라고 외치는 그 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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