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이의 언어 (1)

in kr •  6 years ago 



아린이가 5살이 되면서 3-4살 무렵과는 또 다른 양육 단계에 부딪혔다는 걸 알았다. 나름의 정리를 해본다면 5살은 언어를 통한 소통이 꽤 이뤄지지만 그 언어가 내포한 세계관은 공유되지 않은 상태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아린이는 나와 약속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린이는 그것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약속을 어기게 된다. 그러면 나는 약속을 어기는 것에 대해 내가 가진 기준에 따라—내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관념에 따라—아린이에게 반응하게 된다. 초기에는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것은 누가 나빠서가 아니라 아린이와 내가 각자가 가진 세계의 법칙을 따라 자연스러운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며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조율을 해나가야 하는 문제일 뿐이란 걸 알게 됐다.

이런 부분에서 해결 방향을 찾도록 도와준 게 나에겐 NVC였다. NVC는 나의 언어습관을 바꿀 뿐 아니라 상대의 욕구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따금씩 아린이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이 법칙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NVC는 갈등 상황이 아닐 때에도 위력을 발휘해줘서 아린이와 내가 멋진 대화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런 나의 노력과 마주하는 중에 아린이의 언어와 행동도 바뀌어 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들이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메모를 하곤 한다.

꼭 그것과는 관계없는 것들도 있지만 즐거웠던 대화들을 몇 개 적어본다.


“아빠가 내 마음을 알아주니 좋네!”



자기 전 아린이와 놀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이전에 나와 약속한 게 생각났는지 “아빠 OOO 해놨어?”라고 물었다.(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이미 다 준비해놨지~”하고 웃어 보였더니 아린이가 한 말. 아내는 아린이 말이 너무 예쁘다며 “그럼~ 아빠는 늘 아린이 마음을 생각하지~”하고 받아주었고 아린이는 신이 나서 춤을 췄다.


“낫고 싶어!”



아린이가 모기에 물린 데가 긁고 싶다고 쩔쩔매며 울고 있었다. 나는 약을 발라주면서 아린이가 모기 물린 자리를 긁을 경우 상처가 나서 오히려 더 아파질 거라고, 차라리 간지러움을 잠시 참는 것이 좋을 거라고 타일렀지만 아린이는 계속 손톱으로 모기 물린 곳 주변을 긁으며 끙끙 앓았다. “아린아, 아빠 말을 잘 생각해봐. 간지럽고 싶어 아니면 아프고 싶어? 어느 게 나을 거 같아?”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내가 아이에게 ‘이것 아니면 저것’식의 잘못된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후회됐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아린이는 나의 수준을 넘어 있었다. 둘 중 하나라는 식의 내 말에 걸려들지 않고 아린이가 한 말.


“아빠 회사에서 내 생각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솔이가 현관 앞에 달려 나와서 뽀뽀해달라고 얼굴을 들이민다. 그리고 아린이는 숨바꼭질을 하듯 어딘가에 숨어서 내가 찾아오길 기다린다. 그날도 어디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연기를 하다가 안방 한쪽에서 찾아내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더니 “아빠 오늘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했다. 그래서 아린이가 보고 싶어서 일찍 왔다고 했더니 아린이가 한 말. 나는 정말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해주었다.


“힝. 아빠가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동안 주말 아침에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곤 했다.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읽다가 아내가 일어났다고 연락을 주면 들어가곤 했는데 그날은 정말 아이들이 일찍 일어나서 거의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냐는 아린이의 말에 책을 읽으러 갔었는데 아린이가 일찍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거의 못 읽고 바로 왔다고 했다. 그날 저녁 아린이가 난데없이 그 이야길 다시 꺼내면서 한 말. 아린이는 자기가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아빠가 책을 못 읽게 됐던 게 미안했나 보다. 아린이는 어느새 아빠의 욕구에도 관심을 가져주게 됐다.


“엄마 아빠 결혼하겠다.”



침실을 나가기 전에 내가 아내를 안아주자 이걸 지켜보던 아린이가 한 말. 너무 우습기도 하고 아린이가 스킨십에 대해 어떤 개념이 생겼음을 알게 되자 마치 모르는 사람 앞에서 껴안은 것처럼 시선이 의식되기도 했다. 아마도 아린이는 자기도 안아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얼마간은 자기 전에 인사를 나눌 때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방 뛰면서 “사랑해, 사랑해”하면서 나에게 안기는 걸 몇 차례 했다. 그러니까 또 이상하게 아내의 시선이 의식되더라.


“아빠, 나랑 지금 숨바꼭질 할 수 있겠어?”



그 전날 나는 아린이와 의견 대립이 있었다. 아린이는 저녁 내내 나와 숨바꼭질을 하면서 놀길 바랐고, 나는 너무 피곤했고 쉬고 싶었다. 서로 약속한 횟수만큼 숨바꼭질을 하고도 아린이는 더 하고 싶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고 나는 아린이를 불러 앉혀서 설명을 했다. 우리가 서로 원하는 게 다를 때는 상의를 통해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떼를 쓰는 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린이가 화를 내는 건 아빠가 아린이랑 놀아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데 사실 그건 아빠의 선택이다, 아린이가 아빠를 설득할 수는 있어도 아빠가 원하지 않는 걸 강요할 수는 없다.. 등의 내용이었다. 나는 아린이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었다. 다음 날 아침, 아린이가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서는 정중하게 묻는 말. 나는 아린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맘이 가득해선 “그러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재밌는 회사에 가잖아~ 힘을 내~”



나는 종종 아린이가 어린이집에서 즐거웠는지를 물어보는데 아린이는 내가 회사에서 재밌는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이어준다. 그러면 나는 늘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재미가 없으니까 뭐. 그러다가 최근에 내가 아내와 이직을 주제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걸 캐치했는지 “회사가 왜?”하고 물었고 나는 곧 회사를 옮기게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랬더니 아린이는 “그 회사는 재밌는 회사야?”를 제일 먼저 물었다. 나는 그럴 것 같다고 답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퇴근 후 피곤해하는 나를 보며 아린이가 한 말. 나는 아린이가 나의 욕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억해준다는 게 너무 고맙고 기뻤다.


“그럼 밥 먹고 사다 주면 어떨까?”



퇴근 후 나는 거의 녹초가 되곤 하는데, 아린이는 내가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오는 걸 보더니 자기가 먹을 음료수를 사다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얼마든지 사다 주었겠지만 지금 와서 아빠를 다시 나갔다 오라고 하는 건 너무한 것 같다, 아빠는 너무 배가 고프고 힘들다, 내일 들어올 때 사주는 건 어떻겠냐고 했고 아린이는 꼭 지금 먹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서로 의견이 다른데 한 사람의 의견이 상대방의 의견을 무조건 무시하도록 하지는 않아야 한다며 아빠는 지금 밥을 먹고 싶고, 쉬고 싶은 욕구를 양보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린이도 지금 음료수를 먹고 싶은 욕구를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런 ‘하찮은 욕구’ 때문에 내가 희생해야 한다니 너무 어이가 없다는 식의 판단적인 마음이 생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5살 아이라 하더라도 그의 욕구를 내가 폄하할 수 없으며 내가 먹고 쉬고 싶은 것만큼이나 아린이가 지금 당장 음료수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윈리를 되뇌었다. 그러고 나자 나에게도 양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에 아린이가 한 말. 나는 그것이 먹고 쉬고 싶은 나의 욕구와 음료수를 마시고 싶은 아린이의 욕구가 적절히 조화된 방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아린이와 편의점에 가려는데 아솔이까지 따라나왔고 우리 셋은 잠깐이지만 즐거운 외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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