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시절, 8번째 서류 불합격 소식을 듣고 나는 절망했다.
3개월 후의 내 삶이 보장되지 않음이, 처음으로 안전장치가 없는 세상에 던져졌음을 깨닫는 일은 몹시도 고되었다. 지친 마음에 요리라도 하나 해먹자 싶어 집 앞 가게를 들렀다.
그리고 면식 코너 근처에서 당면唐麪을 집어 들었을 때, 그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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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를 마치고 나와 비루한 몇몇의 훈련병은 부전역 TMO에 배출되어 자대배치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가 배치될 자대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가 당시로서는 남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었기에, 그 순간이 내겐 막연한 공포로 다가왔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것들에 대해 들은 바가 업스니 아는 바가 없었고, 알지를 못하니 대비할 수 없었으며 다만 두려워할 뿐이었다.
자대를 향하는 기차는 시간을 요했고 그 초조한 시간들이 우리를 바늘처럼 찌르는 시간 속에서, 지루한 표정의 속편한 TMO병은 독서를 종용했다.
그때 뽑아 든 책이 남한산성이었다. 작가 김훈의 이름값이나 남한산성의 역사적 인식 따윈 없었고, 단지 표지가 멀쩡한 가장 새 책이었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시대극으로, 병자호란 당시 성안에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당연히 그들의 삶은 비루하고 절망적이었으며 김훈의 묘사는 그 고통의 한자락 조차 놓치지 않을 만큼 탁월했다.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남한산성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내가 처한 현실을 미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설의 말미,
남한산성의 항쟁을 지휘하던 늙은 대신은, 자신을 만류하는 종에게 말한다.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는 당면(當面)한 일을 당면하려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전율했다. 아...이 얼마나 비장하고 명쾌한 일갈이던가.
이 당연한 이치가, 단지 당면한 일을 당면하겠다는 당연한 결심이 어찌 이리 비장하고 멋들어지나.
그렇구나. 당면한 일을 당면해야 하는구나. 당면한 일은 얼핏 저절로 다가오는 듯해도 내가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았을 때에야 진정으로 당면되는 것이었구나.
이 깨달음이 남은 군 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도 정량화 하지도 못한다. 다만 적어도 그 순간에 그 말이 주었던 위안과 용기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여러모로 힘든 세상이다. 당면한 일을 당면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할 만큼.
그러나 한번 마음을 먹으면, 그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가파르게 성장할 수 있다. 우리 모두 당면한 일을 당면하자. 장담컨대 그 다음에야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을 헤쳐 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일단 TMO에서의 자대배치 기억이 있으므로 공감합니다.
아 그 시절이 추억이긴한데 서글펐던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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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에세이입니다. 저도 남한산성을 재밌게 읽었죠 저는 그때가 고등학생이였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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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면한일을 도망치지않고 당면하는건 너무 어려운일같습니다... 저 자신도 도망칠때가 너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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