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정치] 서울의 ‘26번째’ 자치구의 의미:도시난민과 도시정의-앞 부분

in kr •  7 years ago  (edited)

서울의 ‘26번째’ 자치구의 의미:도시난민과 도시정의-앞 부분


2016년 11월 27일 공덕역 인근 공유지에서 26번째 자치구의 출범을 알리는 행사가 있었다. 몇몇은 ‘26번째’라는 의미를 몰랐으나 –서울시의 행정구가 25개인지 모르는 사람의 경우 – 많은 경우에는 이런 선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어차피 싸운다는 건데 굳이 자치구를 앞세울 필요가 있어?’라는 이야기에서 ‘현실적인 법과 행정의 한계가 있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의 중간 쯤에 놓인다. 둘 다 권력이 문제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권력에 대한 회의주의를, 다른 하나는 권력에 대한 비관주의를 담고 있다. 이 둘은 평면에서는 갈라지지만 입체의 공간에서는 같은 방향값을 가지고 있다. 바로 권력에 대한 현실주의다.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의 권력은 개개인의 시민들로부터 나오고, 그것을 통해서 확립된 법과 질서는 적어도 시민 개개인의 생존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인 민주적 권력론의 기본이겠다. 하지만 국가에서는, 도시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동화에서 공주와 마녀의 대립은 구체적이고 선명하지만 현실에서 마녀는 공주의 모습이거나 왕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이를테면 노점상의 문제를 보자. 누군가에겐 생존의 문제이지만, 여기에 대해 거리를 걷는 보행자의 권리를 같다 붙이거나, 소수에 불과한 기업형 노점을, 비슷한 품목의 점포 상인을 대비시키는 것은 노골적인 권력의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노점이 누군가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라 할 때 노점을 ‘배제’하려면 당연히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개의 현실 권력은 노점=불법임으로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생존과 바꿀 수 있는 법과 질서를 요구하는 것일까? 그러면 다시 돌아가 우리가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이유는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구성원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것인가. 

‘26번째 자치구’라는 선언이 여전히 어색한 이유는 익숙한 현실적 권력의 문법을 뒤집기 때문이다. 공동의 문제를 풀기 위한 정치적 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권력에 대한 회의주의를 반대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존의 문법으로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작동할 수 있다고(권력에 대한 비관주의를 반대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26번째 자치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적이다. 10년 가까이 청계천복원사업에서 가든파이브까지 이어지는 청계천상인들의 투쟁이, 서울 곳곳에서 뉴타운재개발로 쫒겨나는 주거세입자의 처지가, 30년 넘게 한 곳에서 장사를 해온 포장마차 이모들의 내몰림이 ‘26번째 자치구’라는 이름으로 모일 지는 몰랐다. 각각의 싸움이 각자의 골목을 타고 진행되면서 함께 몰린 벽이 같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고민이 시작되었고, 작년부터 ‘도시난민’이라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바탕으로 기존이 도시권력에서 비껴선 새로운 권력을 만들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다양한 곳에서 진행되던 공유지 운동, 특히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과 같이 ‘26번째 자치구운동’은 구체적인 물질성을 제공했다. 이로써 생존의 권리가 박탈당한 이들의 자치적인 정치 공동체 운동으로서 ‘26번째 자치구운동’은 정부가 아니면 기업이 독점하는 공유지의 재-공유화를 위한 공유지 운동과 만나게 되었다. 아래의 내용은 완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고민을 다루고 있다.    

[서울지역 철도유휴부지 개발 현황]

(문화도시연구소 정기황 선생의 '경의선공유지 현황' 글에서 재인용)

이주와 난민: ‘사이’에서 ‘내부’로


주요한 연구 흐름을 보면 난민과 도시의 관계는 주요 분쟁국가에서 파생되는 강제적인 인구이동 혹은 이민의 경험과 연관되며 주요한 유입의 장소인 도시를 매개로 발생하는 현상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특정 도시의 정책이나 시민사회가 외부로부터의 이주에 대해 수용하는 방식이거나 혹은 분쟁지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이주민들이 어떤 도시를 선택하는가라는 맥락에 주목한다. 즉 일반적으로 난민을 “박해, 전쟁, 테러, 극도의 빈곤, 기근, 자연재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람”(위키피디아)으로 정의하는 경우 그것은 국가 ‘간’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난민의 보편적인 의미는 국가 간의 이동을 전제로 한다. 통상 ‘이주’ 혹은 ‘이민’의 경험을 전제로 해서 국가 수준의 분쟁이나 축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주나 이민이라는 경험을 굳이 국경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다양한 차원에서 이런 경험이 실제한다. 우리가 도시환경에서 경험하는 이주를 생각해보자. 현행 법제도에서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비자가 가구들은 2년 마다 이주를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런 이주는 비자발성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앞서 난민이 겪게 되는 형태와 유사하다. 다소 극단적인 비유이겠으나 서울에서 벌어진 다양한 도시개발 역시, 다양한 전쟁형태에서 벌어지는 집단 파괴와 대량 이주의 모습과 닮았다. 2010년 말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지역의 재정비촉지구역 규모는 총 329개 구역에 2,591만제곱미터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4.2%에 달한다. 이를 산술적으로 전체 세대의 비율로 따져보면 17만 5,973세대에 해당한다. 즉 전면철거 방식으로 진행되는 기존의 뉴타운 재개발 사업의 특징에서 비춰보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뉴타운 재개발사업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대상이 적어도 10만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와 같은 집단적인 경험은 사실 ‘난민’이 처한 비자발적인 강제 이주의 경험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비단 이와 같은 집단적 비자발적인 이주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이주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유사하다. 특히 노점상에서부터 임차상인들이 공통으로 겪는 ‘법적 권리 없음’이라는 맥락에서 보자. 세상의 것들은 모두 ‘누군가의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의 것이라는 것이 사실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뜻에 불과하고 이와 같은 사태가 모두에게 재앙에 가깝다는 우화를 만들어낸 것은 자본주의다. 다양한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사례는 안타깝게도 기존의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겪게 되는 공유의 비극을 다룬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도시의 공간은 대개가 누군가의 것으로 구성된다. 개인이거나 법인이거나.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소위 공유재산에 대한 성격이다. 즉 행정과 공유재산과 시민 간의 관계 설정이 자본주의적 사적 경제 체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맥락이다. 통상 도로는 공공재로 누군가가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차도는 ‘자동차’가 독점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가정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 자동차의 주정차를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갓길 주차의 사례를 보자. 분명 갓길 주차는 애초 도로의 목적인 자동차의 흐름을 방해함으로 도로 개설의 목적에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길 주차를 허용하는 것은 인근 주거지나 상가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배타적 권리를 보장해준 것이다. 이런 조치는 사회적 합의 과정보다는 행정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그리고 어느 순간 관행이 된 태도 탓에 유지된다. 

유사하게 사람이 다니는 보행로를 생각해보자. 이미 수많은 도로 지장물들이 필요시설이라는 이름으로 차도가 아닌 보행로에 올라와 있다. 대표적으로는 가로수가 그렇다. 전기배전판이나 자동차를 위한 각종 신호기기도 차도가 아니라 보도 위에 올라선다. 이 역관계, 왜 도시의 도로는 자동차가 우선하는가라는 것은 크게 질문거리가 되지 못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건축법’ 상 의무사항인 건물 앞 공개공지를 떠올리게 된다. 서울의 대다수 건물 앞에는 법적으로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개공지가 있다. 하지만 그곳이 정말 자유로운가. 오히려 화단 등으로 이미 사유공간이 되어버린 것이 대다수고 그나마 개방된 곳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서 있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건물의 소유자는 때때로 공개공지를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공공기관인 철도공사가 주요 역사에 도입한 민자사업들을 보자. 용산역 광장은 어느 순간 대규모 이벤트 장이 되었다. 주요 할인행사나 기업의 홍보 부스가 차려진다. 엄밀하게 보면 역광장이지만 그 광장은 시민의 것으로 채워진 적이 없다. 대형 마트 앞의 공개공지는 자연스럽게 마트의 야외 판매대가 되고, 주요 건물 앞 공개공지는 대놓고 주차장으로 사용한다. 

이에 대하여 행정은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하기 보다는 선택적으로 대응한다. 공개공지를 침해한 건물주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음’으로서 보호하고 생존을 위해 거리의 생활을 선택한 이에 대해서는 ‘불법’임을 내세운다. 즉 행정이 스스로 관리하고 있는 공유지에 대해 사적 소유권자처럼 움직인다. 그럼으로서 스스로 행정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일반성과 보편성을 해친다. 문제는 이런 행정의 편파성이 어떤 사회적,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의 처지다. 소유권으로 구획된 도시 공간은 불가피하게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을 끊임없이 밀어낸다. 그런데 행정에 의해 공유지가 사적 소유권의 형태를 띠면 띨수록 이들이 설 곳은 사라진다. 

결국 난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난민이 전통적인 국민으로서의 소속감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한 이라고 정의할 때, 도시에서 ‘가지지 못한 자’는 어떤 공간도 점유할 수 없는 이가 되고 이들을 누구도 챙기지 않음으로서 소속없는 자로 만들어 낸다. 따라서 현재 난민은 국가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시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의 이주 역시 ‘합법’이라는 법률적 형태를 통해서 비자발적인 강제를 통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보면, 국제적인 이민의 이유인 ‘전쟁’과 닮았다. 전쟁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적군과 아군의 구분’에 있다.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것은 전쟁의 본질이고 세세하고 개별적인 사정 따위는 ‘부수적인 피해’가 되고 만다. 지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은 이런 전쟁과 얼마나 다른가. 특히 행정이 내세우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법이다’라고 외치는 교만함은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이 양심을 누르기 위해 사용하는 자기 암시를 닮았다. 

2000년 이후 서울은 거대한 난민의 도시가 되었다. 과거에 가식적으로라도 보장했던 ‘보상’이라는 말이 사라진지 오래다. 강력한 법의 집행자로서 거만을 떨지만, 정작 소유하고 있는 자들 앞에서는 법보다는 현실을 외친다. 건물주가 4~5년마다 불법건축물에 대한 과태료를 감당한 댓가로 막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을 ‘양성화’라고 부른다. 소유자들은 그 소유를 지랫대로 수많은 불법을 ‘양성화’하지만 애초 가지지 못한 자들은 끊임없이 ‘음성화’되며 지워지고 사라질 것을 종용받는다.


불법건축물 양성화라는 ‘사유 재산권’의 역사   

불법건출물이란 ‘건축법’에서 정한 허가절차를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지은 건축물을 뜻한다. 간단하게는 베란다의 개축에서부터 옥상에 지은 소위‘ 옥탑방’, 그리고 임의로 반 층이나 한 층을 더 올린 다세대 주택 등이 그렇다. 당연히 ‘불법’이니 원상 복구하라는 이행 강제금을 물린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든 불법건축물의 재산 가치는 늘 이행강제금의 부담보다 크다. 또한 행정청 역시 불법 건축물을 철거하지 않는 건물주에 대해 행정집행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불법 건축물에 대해 지난 1980년부터 최근 2014년까지 특별조치법까지 만들어 초법적으로 양성화해줬다. 불법 행위를 사후에 면책시켜준 것이다. 아래 표와 같이 1차, 2차 조치는 7~80년대 도시환경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45만건이 합법화되었다). 정부가 국민의 주거를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후죽순 들어섰던 불법건축물을 계속 불법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 이후에 시행된 3차, 4차 시행은 다르다. 알다시피 해당 시기는 부동산 거품이 막 거세지던 시기였고, 전세대란 등이 논란되던 시기다. 이 시기에 편승해 건물주들의 불법 건축물을 양성화하는 것이 ‘서민들의 주거안정에 도움’이 되고 ‘재산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14년에도 시행되어 3만건에 달하는 불법건축물이 양성화되었다. 2017년 현재, 국회에는 총 4건의 같은 법률 제정안이 상정되어 있다. 김광수 의원이 발의한 ‘전통시장 내의 특정건축물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 법안’, 김도읍 의원, 박홍근 의원, 김병욱 의원이 각각 발의한 ‘특정건축물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다. 게다가 2016년 국토교통부는 불법건축물에 대한 이행강제금을 감면해주는 시행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안그래도 낮은 시가표준액 기준 이행강제금의 70%만 징수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건축물의 소유주에게는 불법을 구제해주는 법제도의 특혜가 뒤따른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소규모 건물주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핵심은 불법을 양성화하는 기준으로서 ‘소유권의 유무’ 즉 ‘신성한 재산권’의 논리다. 이처럼 재산권의 맥락을 삭제한 채 공유의 논리를 불법과 합법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얼마나 한계가 있는 접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 소유가 없는 이들에게 생존의 토대를 빼앗은 것은 합법으로 옹호가 되지만 작은 소유라도 있는 이들에게는 더 많은 소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양성화’인 모순의 논리가 동시에 작동한다.

 (이 문장을 누르시면, 뒷부분의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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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산권 신성화는 뭔가 건드리지 못하는 성역 느낌입니다. 스팀잇에서도 그런 입장들이 많이 보이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글 여러개로 나눠질 내용이 한 글에 들어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어느정도 선행지식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읽는게 조금 ㅋㅋㅋㅋㅋ
특히 뒷부분의 양성화 부분은 더 그렇네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