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4779: 문창제군일에 밝히는 ‘볼 견’과 ‘볼 관’과 ‘그냥 앎’
관점(觀點)은 바라보는 주체적의 앵글을 말함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View Point 를 말한다. 즉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거나 바
라보는 특정한 방식 혹은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각의 시작점을 말한다. 그래
서 관점은 시점(視點)이며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깨닫고 제일 먼저 5 제자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말해주는데
그 것이 무아(無我)이다. 무아는 무소유(無所有)와 윤회(輪廻)만큼이나 엄청
난 오해와 곡해속에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무아는 나의 육신이나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없다! 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내가 있다. 나다. 라는 그 생각을 하는 View Point 가 부처님이 성도하신
그 날, 새벽녘에 떠오르는 금성 샛별 계명성 효성과 보리수 아래 앉아있는
자신의 부모에게 받은 육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연히 느끼고 난 후
자신의 몸을 보니...생 노 병 사 의 과정으로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사라지는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그냥 알게되신 것이다. 어떤 이해의 주차나 이해의 대
상을 깨달음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앎의 영역’에서 하나임을 알게되신 것이
다. 그래서 부처님은 온 우주가 자신의 몸임을 알게되신 것이다. 그 것을 법
신(法身)이라고 한다.
앞의 제 13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32상으로 여래를 견(見) 할 수 있겠
느냐고 물었다. 수보리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그리고 지금의 26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32상으로 여래를 관(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보리는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흥~ 하시며 수보리 존자에게 말슴하시기를..“ 그러면 너는
이미 32상을 갖추고 있는 전륜성왕의 몸에서도 여래를 보겠구나..“ 하신다.
수보리 존자는 그 말씀을 듣고 급히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아닙니다. 32상
만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 견(見)은 모든 것의 관점(觀點)과 시점(視點)이 육안이 시발점이다.
그래서 자신이 있디! 라는 ‘그릇된 인식’하에서 대상을 보게된다.
반면에 관(觀)은 견(見)과 마찬가지로 관점과 시점은 동일하다. 단 관은 견의
관점에서 보이는 상황과 형태너머의 그 내용과 본질을 보는 것이기에 ‘ 그릇
된 인식’이 아닌 ‘참된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반야(般
若)라고한다.
그 참된 인식으로 대상이나 상황이나 형태나 결과를 보고 반응하는 것이 달
라질 수 밖에 없는데 그 때 그 반응하는 행위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
이다.
이 반야바라밀의 행은 수준이 있고 레벨이 있고 정도차이가 있다. 그래서 깊
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반야심경에서는 ‘행심반야바라밀다’라고 했다.
그러니 법신(法身)을 말하려면 견(見)으로도 안되고, 관(觀)으로도 아직은 부
족하고 앎의 영역에만 속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법신의 정체성은 기쁨이며 환희며, 노래함이며 즐거움이며, 사랑이며 자비며,
풍요다. 법신도 공부하고 성장한다. 그래서 매월 음력 3일 문창제군일이 중.
요하다. 법계를 공부하고 소통하는 날이어야 한다.
법신의 힘을 기르기 가장 좋은 곳은... 내 자연이기는 하지만 도시에서는 ‘농
협 하나로 마트’ 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곳에 있는 다양한 야채, 과일, 꽃, 그리고 소고기 닭고기, 각종 수산물 그
밖에도 라면 과자 쌀, 핸드폰 세제 운동화 전자제품 수건등등이 모두 one
pointed mind 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한다. 이 세상에 너 아닌게 하나라도 있고, 한 사람이라도 있는 줄
알어?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법 신 비 상 분 제 이 십 육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수 보 리 어 의 운 하 가 이 삼 십 이 상 관 여 래 부
須菩提가 言하사대
수 보 리 언
如是如是하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여 시 여 시 이 삼 십 이 상 관 여 래
佛言하사대
불 언
須菩提야 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인댄 轉輪聖王이 卽是如來로다
수 보 리 약 이 삼 십 이 상 관 여 래 자 전 륜 성 왕 즉 시 여 래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수 보 리 백 불 언
世尊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세 존 여 아 해 불 소 설 의 불 응 이 삼 십 이 상 관 여 래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이 시 세 존 이 설 게 언
若以色見我어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약 이 색 견 아 이 음 성 구 아 시 인 행 사 도 불 능 견 여 래
제26분 법신은 상相이 없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그러하옵니다.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만일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하리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응당 삼십이상으론 여래를 볼 수 없겠나이다.“
그때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고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이라
결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Chapter 26.
Then the Buddha inquired of Subhuti:
"What do you think Subhuti? Is it possible to recognize the Buddha by the 32 physical marks?"
Subhuti replied, "Yes, Most Honored One, the Buddha may thus be recognized."
"Subhuti, if that were true then Chakravartin, the mythological king who also had the 32 marks, would be called a Buddha."
Then Subhuti, realizing his error, said, "Most Honored One, now I realize that the Buddha cannot be recognized merely by his 32 physical marks of excellence."
The Buddha then said:
"Should anyone, looking at an image or likeness of the Buddha, claim to know the Buddha and worship him, that person would be mistaken, not knowing the true Budd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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