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os의 주해

in kr •  4 years ago 

오랜만에 문을 밀고 들어간 술집엔 익숙한 주황색 등이 테이블을 빛추고 있었다. 스무살,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어설펐던 연애로 울고 웃던 장면들이 테이블에 겹쳐보였다.

항상 우리가 하던 대화가 그러하듯이, 그 날도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에 대해 나름대로 주해를 붙였다. 연애가 잘 풀리지 않던 H는 사랑에 관해 물었다. 막상 가시계의 행동은 몹시 서툴렀던 시절 내가 읊던 사랑의 이데아가 무엇이었는지.

철학과 지적허세충답게 'philia'에 꽂혀 '○○ 의
□□적 △△' 따위로 사랑을 설명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아 "원래 그런 건 사랑이 힘든 사람들이나 고민하는 것"이라 얼버무리고 넘어갔었다.

H에겐 미안하지만 난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괴롭게 느끼는 사람들이 대개 그것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래서 다시금 이 주제에 관해 끄적인다. 사랑은 무엇일까? 참 eros는 매우 얄팍한 감정이며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시베리아에서 만난 목사님은 "함께 즐겁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힘들고 싶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셨다. 힘들 때마다 찾아 읽는 「아리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긴 한다.

"사랑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용감하고 결단력있게 만들지요. ....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나를 믿고 자기 자신이 혁명대열에서 사라져버린다고는 생각치마세요. 나는 장래의 내 짐이 두 배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혁명은 하나의 추상물이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 함께 있으면 우리는 튼튼합니다. 떨어진다면 당신도 나도 하나의 개체에 불과할 뿐 완전한 하나의 단위를 이룰 순 없습니다. 왜 당신은 아가씨 한 번 사랑해보지 않고 죽으려고 하는거죠? 혁명가도 사랑입니다. 기계가 아녜요."

나는 그동안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한)다. 나의 힘듦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떠나간 이후로 그이의 그릇을 향한 미움때문에 조금은 이해하는 척하긴 하지만. 그럴거면 동지를 찾아야지 왜 애인을 찾는지. 혹은 가능하다면 그들은 1920년대 무장 혁명가 정도 의연한 성품을 가지지 않았을까.

eros는 그냥 이누잇의 허스키같은 거다. 유난히 추운 날 살기 위해 허스키를 들여 끌어안고 자는 이누잇사람처럼. 유난히 애욕 혹은 성욕에 허덕일 때, 좀 더 고등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하는 것. 각자의 필요가 사라지면 식는 이기적인 감정. 사실 상대를 위함 역시 자신이 좀 더 고등한 인간이라 여기기 위한 과정.

그래서 지금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상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면, "서로를 위해, 그리고 서로가 공유하는 가치를 위해 함께 힘들어 할 수 있는 것"이라 가식적으로 답하겠다.

술기운에 체면이고 뭐고 솔직하게 답한다면, "굳이 정의까지 따져 물을 지위에 있지 않은 쾌락. 여행처럼 가볍게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재충전할 수 있는 쾌락의 과정"이라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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