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 같은

in kr •  10 months ago  (edited)

신호대기 중 잠깐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잔뜩 끼어 있는 잿빛 먹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노란빛이 보였다. 밤새 비를 다 쏟아낸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구름 사이의 노란빛이 조금이라도 붉었더라면 영락없는 용암 모양이다. 하늘을 가득 뒤덮은 용암을 상상하자 뒷덜미가 살짝 싸늘해졌다.

맨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건너편에 차들이 하나도 없다. 좀 과장하면 거의 100여 미터 정도 앞의 도로가 텅 비어있다. 50여 미터 앞에 한 차선 너비 반 정도 크기의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담요나 옷가지 같았다. 누군가 지나가다 떨어뜨린 모양이다.

도로 옆 전신줄에 앉아 있던 검은 새 대여섯 마리가 그 물체 위에 모여들었다. 멀어서 잘 안 보였지만 비둘기는 아니었다. 몸집이 커서 까마귀나 까치 같았다. 피해 가야 되나.

초록불이 켜지고 액셀을 밟았다. 검은 새와 시커먼 물체에 가까워졌다. 새들은 그 물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차들이 가까워지자 검은 새들은 원래 있던 전신줄로 날아갔다. 아마 신호대기 시간이 되면 다시 내려올 것이다. 시커먼 물체 위 곳곳에 흩어진 시뻘건 속살이 보였다. 용암 같았다. 로드킬을 당한 동물의 사체였다. 작은 개 아니면 큰 고양이일 것 같다.

용암 같은 하늘 밑에서 용암 같은 사체를 뜯어먹는 시커먼 새들을 도시 한가운데서 보게 될 줄이야. 문득 멸망의 징조처럼 느껴져 섬뜩하면서도 ‘반가웠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