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앞에서는

in krsuccess •  8 days ago  (edited)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콘크리트 지평선 위로 막 치솟은 해가 사정없이 눈을 찌른다. 햇빛이 망막과 수평을 이뤄 모자의 챙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겨울이라 초록색은 모두 빛을 잃었지만 그 대신 갓 태어나 활력 넘치는 햇빛 덕분에 회색 콘크리트와 탁한 황색 수풀이 생기를 띤다.

순간 강렬한 오렌지빛으로 흐릿해진 내 시야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 잠시 생명을 멈춘 누리끼리한 황색 수풀 사이로 부드럽게 너울거리는 작은 흑백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대체 이 우아하고 유려한 움직임은 뭘까.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그 움직임에 집중했다. 고상한 턱시도를 걸친 흑백 무늬 고양이였다. 아직은 성묘가 되기 전의 청소년인 것 같다. 고양이는 어쩜 저렇게 우아할까.

내 왼편에 좀비처럼 삐꺽대며 걷는 노인 한 명이 지나간다. 며칠 전 노인이 지나가던 바로 그 길에서 털 정리가 전혀 되지 않아 초췌한 나이 든 황색 고양이가 터덜터덜 걸어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시간 앞에서는 모두가 우아할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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