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뿌옇게

in krsuccess •  9 days ago  (edited)

봄학기의 수업 첫날, 남학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여학생인 삼십여 명 남짓 되는 학생들 틈에서 어깨 아래로 길게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호기심이 잔뜩 배인 똘망똘망한 눈을 반짝이며 나의 말에 집중한다. 남자가 저 정도로 머리를 기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몇 주가 지나고 학생들과 선생은 슬슬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이제는 수업 중에 간혹 가벼운 일상 얘기를 꺼내도 덜 어색할 때가 되었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학생 한 명 한 명과 진행하는 과제를 살피며 도움말을 주고받는 시간에도 과제와 관련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어떤 학생들한테는 깊게 새겨질 수도 있다. 기분 좋은 말이던 기분 나쁜 말이던.

학부 시절이었다. 실기 수업이라 학생들은 각자 자리에서 작업하고 교수님은 실기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봐주었다. 이윽고 교수님이 내 옆에 멈춰 서서 도움말을 주었다. 그리고 지나가듯 가볍고 유쾌하게, 허리까지 늘어진 내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어도 멋지겠다고 말했다. 내심 동경했던 교수님이 내게 관심을 준 것 같아 기분 좋았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장면을 자주 즐겨 봤던 영화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이제는 좀 오래되어 빛깔도 바래고 먼지도 묻고 스크래치도 났지만.

학기 중반이 넘어가면서 그 남학생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네요. 나도 예전에 머리카락이 길었어요. 의외로 긴 머리가 편하더라고. 남자가 그렇게 기르기 힘들었을 텐데. 남자 화장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화들짝 놀라곤 했었는데. 등등.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류의식. 반가움. 뭐 그런 것들을.

하지만 정말이지 다행스럽게도 그 남학생이 내 수업을 듣던 두 학기 내내 그런 말을 입밖에 내놓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걸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아서다. 더군다나 그 학생에게 건네려던 그 말들은 동류의식과 반가움으로 위장한 잘난 척에 가까웠다. 칭찬을 빙자한 품평. 누가 머리가 길건 말건. 머리 스타일이 멋지건 말건. 나 때는. 나도 예전에. 그러니까 너보다 먼저. 네가 했던 일은 이미 다 해봐서. 너처럼, 아니 너보다 잘 알고 있다고 뽐내는. 그런 유치한 잘난 척.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잘난 척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인간이다. 아무래도 그건 역시. 나는 잘난 척 같은 건 하지 않아.라는 잘난 척이었다. 그리고 더 정확히는 사람과의 관계가 두려워서다. 좋은 추억이던 나쁜 기억이던 누군가의 머릿속에 새겨지고 싶지는 않아서다. 그런 사람이 있었나 정도. 기억 속에 적당히 뿌옇게 떠오르는 정도. 딱 그 정도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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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요즘 넷플릭스에서 ‘백년의 고독’을 무척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영상화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멋지게 잘 만들어서 놀랐습니다. 소설 속에는 마꼰도 마을 사람들이 기억이 상실되는 전염병에 걸리는 기이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짙은 안개(같은 것)에 휩싸여 뿌옇게 바래지는 시각 이미지로 연출한 기법이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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