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럴 근본주의’ 전성시대

in liberal •  6 years ago 

반년 전쯤 썼던 글입니다. 그래서 글 말미에서 전쟁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 문제들이 불거져 나오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는 진전해 나가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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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근본주의’ 전성시대
 
 
아마도 한국의 양대 정당은 제각각 ‘근본주의자+리버럴’의 혼합물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 입장에선 자유한국당을 근본주의자로 보고 자신들은 리버럴로 칭하고 싶겠지만,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본다면 그렇다.
 
 
다만 근본주의의 내용이 달랐다. 한국형 근본주의의 핵심은 ‘피해자 정체성’을 ‘서사화’하여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의 심급으로 삼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식 근본주의의 핵심은 피해자 집단이 남한이라는 국가라는 것이다. 이른바 ‘대한민국 근본주의’다. 가해자의 위치엔 물론 북한과 공산주의가 들어간다. 미국에 조아리는 것에 무심하거나 환영하는 그들이 중국에 대한 외교적 수사에 극도로 알레르기를 보이는 것도 그래서다.
 
 
민주당식 근본주의의 핵심은 피해자 집단이 우리 민족이란 것이다. 이른바 ‘한민족 근본주의’다. 이때에 가해자의 위치엔 일본과 미국이 들어간다. 이들이 자유한국당 지지자와 정반대의 편향을 가진 것은 그래서다.
 
 
한국에 부족한 것은 회의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비록 서사의 내용은 달랐을지언정 근세 이후의 경험으로 본인들이 피해자라는 정념만은 확고한 것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이었다. 회의주의자는 애초에 희소했고, 마르크스주의의 자장 안에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한민족 근본주의’의 자장을 제대로 떨쳐내지 못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에도 근본주의의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근본주의란 말은 마르크스주의처럼 정교한 이념 체계 및 논리를 구축하지 못한 조류를 언급하는 것으로 한정하기로 하자. 그러나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도 근본주의자가 많았고, 한국의 각종 근본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 수사를 많이 가져다 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양대 정당은 리버럴을 포섭하는 경쟁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군부독재의 헤게모니가 약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랬다. 이를테면 자유한국당 계열 정당이 리버럴을 대거 흡수한 시기는 김영삼 정권 때였다. 우리가 익히 아는 나중에 민주당을 넘어 오거나, 넘어 오지 않고 많이 나가기도 한 그 정치인들이 보통 그 때에 입문했다.
 
 
그때에 그들은 김영삼 정부의 개혁을 도와주러 간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당시엔 그런 판단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되면서 리버럴은 민주당에 훨씬 친화성을 느끼게 된다. 만일 한국이 정권 교체가 가능한 나라라면, 굳이 자유한국당 계열 정당에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는 판단들을 한 것일 게다.
 
 
문제는 두 번째 정권 교체 이후다. 이명박 정부는 김영삼 정부가 그랬듯 리버럴과도 연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리버럴들은 자유한국당을 악으로 치부하는 서사를 확고하게 습득한 상태였다.
 
 
그리고, 2008년 촛불시위가 터졌다. 이명박 정부는 사명감보다는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리버럴 및 중도파로의 진군을 그쯤에서 너무나 손쉽게 포기한다. ‘문화계 좌익세력’에 대한 사찰로 공세를 시작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못됐던 일, 촛불시위의 배후를 전직 대통령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는 아니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그전에도 그런 징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버럴은 자신들이 감정이입한 대통령의 운명을 보고 피해자 정체성을 서사화했다. ‘리버럴 근본주의자’라는 모순된 집단이 탄생했다.
 
 
이 시절 이후 전개된 김어준의 논리를 내 관점에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리버럴이 저 근본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때로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들은 반칙을 일삼는데 우리만 페어플레이하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조기숙의 논리를 내 관점에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민주당 내에서도 소수파였다. 왕따였다. 저 근본주의자들 때문이다. 바깥에만 근본주의자가 있는게 아니라 우리 편이라고 지껄이는 놈들 중에서도 근본주의자가 있었다. 근본주의자를 근본적으로 확 쓸어버리지 않으면 리버럴이 살 수 있는 나라는 오지 않는다.’
 
 
나는 김어준과 조기숙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이 제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를 취사선택해서 왜곡한다고 본다. 하지만 ‘리버럴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렇다고 그들이 정말로 근본주의자는 아니라고 본다.
 
 
그들은 ‘도구적 근본주의’ 내지는 ‘한시적 근본주의’를 추구한다. 말하자면 머릿속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계엄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대통령의 운명 이후 이렇게 극적으로 사태가 바뀌기 전에도 지금보다는 소수였던 그 지지자 그룹은 언제나 동료들에게 주관적 계엄령을 남발했다. 나는 그들이 평범한 시민들로부터 나중에 고립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근본주의는 너무나 쉽게 만들어진다. 매우 국지적인 규모에서도 말이다. 이를테면 ‘안철수 근본주의’마저 있다. 이 근본주의는 애초 ‘호남 근본주의’와 ‘86 싫어하는 대한민국 근본주의’의 논리를 상당 부분 차용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단 그리 형성된 다음에는 안철수가 호남과 갈라서고 보수파와 싸우더라도 안철수를 중심으로 모든 걸 사고할 만큼 강력하다. 인터넷 매체 변동이 만들어낸 흐름이며, 이를 나는 ‘인터넷제 패스트푸드 이데올로기’라 칭한 바 있다.
 
 
아마 이들의 상당수조차도 리버럴일 것이다. 우리의 리버럴은 인터넷 부족으로 파편화되어 각자의 근본주의를 체화하게 되었는데, 다만 문재인 지지자들의 규모가 그중 제일 클 뿐이다. 나는 이들 중 상당수가 계속해서 근본주의자일 수는 없다고 본다. 사실 그쯤 오래 근본주의적 활동을 한다면, 이미 리버럴이 아니라 그저 근본주의자다.
 
 
‘리버럴 근본주의’에 동의했던 이들이라도 그들이 문재인에게 기대하는 대통령상은 리버럴이지 근본주의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문재인이 타인을 대할 거라고 그들이 기대하고 흥분하는 바’와 정반대로 타인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는 이 역설을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도구적이고 한시적인 리버럴 근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노상 계엄령을 선포한 이들의 자기모순도 시간에 따라 드러날 것이다. 지금도 이미 도금이 벗겨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엔 모든 것이 합을 이루어 좋은 쪽으로 작용하리라 믿는다. 전쟁...만 안 난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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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역설적으로 그들은 ‘문재인이 타인을 대할 거라고 그들이 기대하고 흥분하는 바’와 정반대로 타인을 대하고 있다.”

이 문장에 동의합니다. 그분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몰라도 나날이 폭력성의 강도가 심해지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