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사진은 서울 문래동 철공소 골목 한 편에 위치한 펍 'OLD MULLAE'의 벽 장식이다. 오래된 일본식 목조주택을 개조해 만든 곳이라는데 시간의 흔적이 공간과 잘 조화를 이룬다)
나는 10년 넘게 정부 산하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는 품격이 있다 생각해
계약상의 부당함을 감수하며 한 일이었다.
상호간의 존중과 존경이 있었으니
감수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노인들의 경험을 기록해
사료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다들 알지 않나?
활자가 남기지 못한 역사들, 감정의 역사들,
소리로 사라진 역사들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거.
노인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놀랍고 감동적이었고
때로는 더럽고 추잡하고 교만했다.
불편한 내용이 있더라도 과거의 윤리로 받아들여
잘 듣고 기록하고 귀를 씻었다.
기억은 상대적이며 선택적이니
충분한 자료조사를 통해
거짓과 사실을 밝혀내려는 시도도 하고
거짓의 의미 혹은 기억의 오류를 해석하는 등의
지난한 작업이 필요했지만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나를 비롯해 이런 일을 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일회용품 처럼 취급되기 시작했다.
일에서 품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던 일은 아웃소싱으로 결국 공개 입찰로
'공정'하게 진행될 것이다.
긴 시간과 경험 속에서 쌓인
일의 밀도는 대기중에 사라져버렸다.
사실 딥러닝이 가능한 ai가
이 일에 더 적합할 것이다.
앞으로 내가 나임을 유지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는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당장은 그저 이 일이
작은 돈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돌아가는
일회용 같은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해까지는 이 일을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품격이 사라진 이 일을 내가 계속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