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베아트리체에게 다가가는 단테처럼

in life •  7 years ago 

마디 1

심리학자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이론을 보면

완전한 사랑은 열정, 친밀감, 헌신의 3요소가

조화롭게 되었을 때를 말한다.

반면 영화속의 얘기 같은 낭만적 사랑은

열정과 친밀감만이 있을 때 가능하며

동료적인 사랑은 헌신과 친밀감만 있을 때고

불완전한 사랑은 열정과 헌신만이 있을 때를 말한다.

그리고 사랑의 시간과 사랑의 정도를

각각 X축, Y축으로 그려 볼 때

남녀가 만났을 초기에는 열정이 높고

친밀감이 그 다음이며 헌신이 가장 낮게 나타난다.

다시 일정 시간이 지나 완전한 사랑에서 3요소가 같아진 후

열정은 떨어져 끝으로 갈 수록 바닥을 기고

친밀감은 계속해서 높아지며

가장 낮던 헌신이 점점 높아져 가장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결국 사랑은 처음 청년기에는 꿀물 들이키듯

열정에 목말라 하면서 보내다가

열정이 차츰 식어지면서

정이 무어라고 끈끈한 친밀감에 의존하면서 중년을 보낸다.

나중에는 미치듯 좋아하는 열정도 없고

끈끈한 친밀감도 사라지지만

내 반쪽을 아끼는 헌신에 의존하여 노후를 버틴다.

즉 XY축으로 본 사랑의 그래프는

헌신과 친밀감, 열정의 3요소가 만나는

완전한 사랑은 한 순간이며

이후는 열정은 사라지고

친밀감과 헌신으로 사랑이 유지된다.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나 완전한 사랑이

‘순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항상 애뜻하고

꿈속의 사랑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완전한 사랑이

다시 나에게 온다면(?)

그 속에 푸욱 빠지고 싶다.

마디 2

머리 쓰기로 말하면 구렁이보다 두꺼비가 한 수 위에 있다.

두꺼비는 구렁이의 앞길을 막고서 약을 올린다.

구렁이는 두꺼비를 피해 가던 길을 가려하지만

그때마다 두꺼비는 팔짝 뛰어 구렁이 앞길을 가로 막는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동안 승강이를 하다가

구렁이는 화가 나서 두꺼비를 낼름 문다.

두꺼비의 노림수는 바로 이것 이었다.

구렁이가 두꺼비를 무는 순간 두꺼비의 몸에서 독이 나와

구렁이는 죽고 만다.

구렁이는 두꺼비가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서 피해 가려고 그렇게 애썼는 데도 불구하고

한순간 화가 나는 것을 미처 참지 못하여 결국에는

구렁이는 죽고 만다.

두꺼비는 구렁이에 물려 장렬하게 죽지만

두꺼비 배속에 있던 새끼는 구렁이 몸을 양식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두꺼비는 그래도 자기 종족한테는 피해를 안주고

후세대를 키우기 위해 애꿎은 구렁이를 희생 제물로

삼았지만 윌 듀란트의 '철학의 즐거움'을 보면

에피루스란 거미는 암컷의 생식을 위해

수컷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거미 수컷은 평소에 암컷의 포악한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암컷과 떨어져 산다.

암컷 개미는 자기 맘에 드는 수컷을 보았을 때

줄을 오르내리면서 얌전을 떨고 갖은 교태를 다한다.

수컷은 듀란트의 글을 빌리면

‘마치 베아트리체에게 다가가는 단테 처럼’

조심스레 접근해 암컷을 덮친다.

수컷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고 환희의 교합을 즐긴다.

그러나 환희의 교합이 끝나자 마자 어떤 경우에는

교합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암컷 거미는 수컷을 잡아 먹는다.

또 윌 듀란트는 파브르의 책을 인용하면서

암컷 사마귀의 잔인성을 설명한다.

암컷 사마귀는 교미에 정신이 팔린 수컷 사마귀의

머리를 짤라서 먹는다고 한다.

수컷 사마귀는 머리가 없는 몸으로도 생식을 위해

교미를 멈추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은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암컷 사마귀는 실제 몸으로

‘사랑에는 머리가 필요치 않다’를 보여준다.

얼마전 남극의 펭귄이 후손을 키우기 위해 혹한 속에서

사투하는 모습을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천적들이 활동할 수 없는 가장 추운 때에

새끼를 키우는 펭귄은 알을 부화하기 위해

차가운 얼음위에서 알을 두발 사이에 넣고

뒤뚱뒤뚱 버티는 펭귄의 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감탄스럽다.

두발사이에 넣기도 어려운 알을 억지로 넣어

부화를 시키고 새끼를 키워내는 모습을 보면서

후손에 대한 애정은 끝이 없다라는 것을 느낀다.

새끼를 키워내고자 하는 욕구는 종족 번성에 관한

희망의 단초이며 모든 욕구에 우선하는 것이다.

두꺼비는 새끼를 기르기 위해서 그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리고 에피루스 거미 암컷은

새끼를 얻기 위해 수컷을 희생양으로 삼아

정낭과 새끼에 필요한 영양소를 일석이조로 얻는다.

남극 펭귄은 가장 추울 때에 알을 낳고 부화시켜야만

새끼가 천적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어서

추위를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후손을 키우기 위해서

동물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의 낮은 출산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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