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누리 (전편)

in literal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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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자주 연락을 섞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메신저 앱에 등록된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볼 때마다는 ‘내가 이 사람을 위해 무엇까지 해줄 수 있을까’를 자주 고민하는 편이다. 가끔은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무엇까지 해줄 수 있을까’를 상상하지만 이내 상상에 그치곤 한다. 내가 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상상하는 것은 나의 원활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지만, 남이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상상해봐야 손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베푸는 호의가 내 상상 이상이면 불편하고, 그 이하면 괴롭다.

상철에게 4년만에 메시지를 받았을 때에도, 나는 상철에게 베풀 수 있는 호의의 수준을 이미 정해두고 있었다. 상철은 대학 시절 교양 수업에서 처음 만난 남자다. 그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은 성인 사회의 경력에서 신생아와 돌 지난 아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그에게 꽤나 의지했다. 다행히 그 또한 내가 자신에게 기대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상철은 뽐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 대화할 때에도 그는 문장을 의문문으로 끝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 나름의 겸양인 것 같았다.

글로벌 마케팅 전략에서 소비자의 욕구 자체는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거 아니야?
문헌관 순두부찌개가 2,700원이었던 것 같은데?
승아는 짠 거 먹을 때 엄청 천천히 먹던데?
승아 오늘 엄청 힘든 일 있었나본데?

나는 가끔 상철의 겸양이 조금 지나치다고 느꼈다. 내가 정말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해서 도통 먼저 이야기해주지 않을 때 특히나 그랬다. 나는 성인의 사회와 캠퍼스 생활이 온통 상철의 것과 비슷한 호의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다지 조급해하지 않았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그건 큰 착각이었다. 결국 나는 정말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해서는 상철에게 조금도 물어보지 않았고, 상철은 내 질문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가끔 휴가를 나왔고 내가 3학년이 되자 전역을 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고 대신 똑같은 모양의 아쉬움이 남아 주물처럼 욕심의 자리를 채웠다. 그 후의 상철은 내 인생에서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문자 메시지나 메신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건 거의 연 단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 술이나 한 잔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괜찮은 남자였지만, 그건 더 이상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나는 4년만에 메시지를 보낸 상철에게, 소액의 금전을 빌려주거나 내 주업무인 카피라이팅에 대해 전문가로서 간단한 상담을 해줄 용의가 있었다. 으레 오랜만에 연락하는 동창이나 옛 지인들의 용건이란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철의 용건은 뜻밖이었다. 그는 34살의 젊은 나이에 죽어가고 있었다. 무슨 정신적인 병과 육체적인 병이 동시에 오는 바람에 손쓸 도리도 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내가 입양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나도 상철과 마찬가지로 혼자 살고 있으니 조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나는 새 가족이 생길 것을 대비해야 할지, 못 이룬 첫사랑의 요절에 슬퍼해야 할지 모른 채로 우왕좌왕 그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나는 상철의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상철을 만났다. 그는 많이 작아져 있었다. 팔다리가 가늘어졌고, 어깨가 움츠러들어 있었다. 눈빛은 마치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움푹 꺼진 모습이었다. 내가 그를 실제로 만나는 것은 거의 10년만의 일이지만, 아마 세월의 경과로 인한 변화는 아니리라. 나는 내 화장기와 신경 쓴 옷차림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상철은 먼저 기다리는 나를 보고 미안해, 내가 더 늦었네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바싹 마른 입술이 쪼글쪼글해 보였다.
-내가 30분이나 일찍 와서 그래. 신경 쓰지 마.
우리는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마주 앉았다. 나는 그를 기다리면서 신경 쓰였던 것을 묻기로 했다.
-병원에서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 집에 있어도 된대?
-내가 조금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해서, 병원에서도 내 치료의사를 존중하기로 했어. 그렇다고 내가 삶을 막 완전 포기한 건 아니야. 열심히 진료 받고, 약도 잘 먹고 있어.
-그렇구나. 근데…, 무슨 병인지 물어봐도 돼?
-괜찮아. 내가 정신적인 거랑 육체적인 게 동시에 왔다고 했지? 우선 정신적인 건 조현병이야.
순간 내 표정이 흔들린 것 같았다.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상철의 수척한 얼굴에 비친 미안한 기색은 뚜렷이 보였기 때문이다. 상철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을 제때 먹으면 말을 잘 할 수 있어. 이상한 소리도 안 들리고. 근데 병에 걸리고 나선 우리 집 누리가 나를 자꾸 피하더라고.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내가 누리를 학대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돼. 나는 분명히 제때 약을 잘 챙겨 먹었는데. 근데 그게 착각이면 어떡하지? 줄어든 약통은 환시이고, 약을 먹었다는 기억은 환청에 의한 조작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누리를 제대로 대할 수가 없더라고. 그러니까, 집사로서 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상철은 마지막에 조금 웃었다. 나는 그가 21살 시절과 다를 바 없이 겸양과 배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내가 개울물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이유로 키가 주먹 크기로 작아지면, 옆 사람 슬리퍼를 잡던지 바짓가랑이를 잡던지 살고자 추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상철은, 이 쏜살같은 개울물에서, 그 작고 수척해진 몸으로 누구에게 피해 하나 끼치지 않으려고 바닥에 꽂힌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혼자 조용히 익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럼 육체의 병은 뭐야?
-혈액암이야. 조금, 많이 지났어.
상철이 오른손을 들어 자기 몸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나는 집에 오는 길에 다소 위험한 운전을 해야만 했다. 나름 신경 쓰고 나온 화장이 눈물에 잔뜩 번졌고, 전혀 진정하지 못한 채로 도망치듯이 내 차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 집으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철이 가여워 그만 카페에서 부끄럽게 오열하고 말았는데, 그가 당황하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몸이 바싹 말라서 통이 너무 넓어진 그의 여름 와이셔츠가 내 우는 얼굴을 가려주려고 했다. 몸이 죽어가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남자에게 위로받을 수는 없었다. 더이상 그를 미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내가 상철의 인생에 뭔가 잘못을 한 건 아니지만, 미안한 건 나였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는 내 차까지 나를 따라왔지만 나는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정신없이 집에 도착해 보니 내 가방이 안 보였다. 차에서 내려 찾아보니 조수석 발치 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울며 차에 타는 내게 상철이 내 가방을 들고 와 건네주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아마도 그걸 받고는 조수석에 집어던지고는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나는 더러운 것을 건져내듯이 내 가방을 조수석 구석에서 끄집어냈다. 휴대폰에는 상철로부터 메신저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 열어보니 상철의 고양이인 누리의 사진이었다. 예쁜 치즈 태비였다. 누리는 커다란 눈으로 렌즈를 똑바로 바라보고 뭐라고 하려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가족이 되기 전부터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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