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은 왜 김기식을 고발하지 않는가

in modukagi •  7 years ago  (edited)

20세기 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가 “정치권에 나도는 추문을 검찰이 다 수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노보에 썼다. 그러자 정치부 기자가 진화에 나섰다. “정치에는 정치 논리가 있는데, 검찰이 그걸 무시하면 안 된다”라는 말이었다.
20세기, 정치는 법 위에 있었다. 이건 정치가 타락했다는 뜻이다. “그런 정치라도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정치부 선배의 주장이었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박근혜의 실형은 그 상징적 증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한 바를 고스란히 따라 하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실형을 받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박근혜의 죄목은 시대의 변화를 모른 죄,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 죄가 가장 크다. 박근혜를 무조건 성원하는 태극기부대도 마찬가지다. 성찰이 없고, 소통하지 못하면 패가망신한다. 옛날에는 그 소통이 권력 안의 소통이었다면 지금은 시민과의 공(公)적인 소통이다.
20세기 후반, 기자는 자기 돈 들일 일이 없었다. 스포츠 취재를 가든, 여행 취재를 가든, 해외 경제 취재를 가든, 기자는 ‘스폰서’의 돈으로 갔다. 자기 월급 외에 취재비가 회사에서 따로 나오니 기자는 돈을 양쪽으로 버는 셈이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언론사는 출장비를 스폰서에게 몽땅 미뤘다.
이건 기자가 ‘갑’에 해당하기 때문에 생기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모든 갑에게 생긴다. 대통령 공무원 기자 교사…. 시민을 위한다는 ‘시민단체’도 누군가의 갑이다. 그런 갑을 위해서 을은 한 조각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성의가 ‘촌지’가 아니고 ‘뇌물’이 될 개연성이 크다. 김영란법은 촌지와 뇌물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을을 구원해 줬으며, 촌지를 받고 찜찜해하던 갑마저도 구원해줬다. 나는 현직 기자 시절 “촌지를 거부하고 기사마저 끊어지는 위험을 무릅쓰느니, 촌지도 받고 기삿거리도 받자”라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는다”라는 격언도 동원했다. 당시 대부분의 기자가 이런 정신적 갈등을 겪었으리라고, 혹은 탐욕으로 번민했으리라고 본다.
이런 상황은 많이 개선됐을 것으로 나는 본다. 송희영 조선일보 주필이 대우조선해양 돈으로 외유를 간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는 ‘언론 윤리’를 강화했다고 한다. 그게 얼마나 진실성이 있었는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시대가 변했으니 조심해라”라는 교육은 한 셈이다.
반면에 정치권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 같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해외 출장은 모두 공적인 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적법하다”라며 “(그의 죄가) 해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김원장의 일은 관련 기관의 해외진출을 돕기 위한 의원 외교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거나 관련 기관의 예산이 적정하게 쓰였는지 현장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김원장이 해외 출장을 가서 공적인 업무를 수행했다”는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닌가? 아주 작은 중소기업에서라도 해외 출장을 가서 회사 일이 아니라 개인의 사적인 일을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지금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김기식 원장이 공적인 업무를 수행했는지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김영란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김영란법의 취지는 “해외 출장을 가서는 공적인 일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출장을 갈 때 ‘스폰서’를 끼지 말라”라는 것이다. 만약 그 ‘스폰서’가 ‘이해당사자’라면 죄질은 더 심각해진다. 그런데 김대변인은 결정적 이해당사자인 ‘피감기관’의 돈으로 출장을 간 김원장의 행위에 대해 “해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했다. 누구보다 깨끗함을 자부했던 한겨레신문 기자 출신의 도덕 판단이 이 정도인가 자못 실망이 크다.
도대체 천문학적인 회비를 받는 국회의원이 해외 출장을 가는데 피감기관의 돈이 왜 필요한가? 이는 “나의 재산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탐욕의 결과다. 그정도 탐욕은, 이 정부에서 이해된다는 말인가? 더구나 김원장은 김영란법의 발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원장을 벌하지 않는 것은 김영란법을 사문화시키겠다는 말이다.
야당의 행동도 이상하다.
야당은 청와대에 김원장을 사퇴시키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야당은 그저 김원장을 검찰에 고발하면 된다. 그래서 유죄를 받으면 자연히 사퇴하게 된다. 나는 누구라도 김원장을 고발했으면 한다. 아니면 나라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김영란법을 사수하기 위해서. 그런데 야당은 왜 “사퇴시키지 않으면 고발하겠다”라고 엄포만 놓는 것일까?
바른미래당의 권은희 의원은 김영란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고 한다. “고위 공직자로 임용되거나 취임하기 전 3년 이내의 민간부문 업무활동에 대한 명세서를 공개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식 원장의 사태는 법 개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합의한 그 법을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그런데 왜 야당은 이렇게 자꾸 핵심을 비껴가는 언행만 할까?
그것은 “과거 국회의원들의 행동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겠다”라는 청와대의 협박이 먹히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나무라려니 뒤가 켕기는 것 아닌가?
검찰도 이상하다. 김원장의 김영란법 위반은 국민 모두가 알게 됐다. 당연히 검찰도 알게 됐을 것이며 그러니 ‘인지 수사’에 나서는 것이 검찰의 직분이다. 그런데 검찰은 꿀먹은 벙어리다. 다만, 이해할 만한 사정이 없지는 않다. 검찰의 인지수사가 검찰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기능을 폐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서 검찰이 고발도 없는 이 사건 수사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기식 원장은 검찰에 고발돼야 하며 검찰은 이를 성실히 수사해야 한다. 영화 ‘1987’에서 최환 검사로 분한 하정우는 이렇게 말했다. “권인숙 사건 때 일은 안기부가 저질렀는데 검찰이 똥됐다” 그러면서 외압에 맞서 박종철 군의 부검을 실시한다. 영화를 보면 하정우를 움직인 열정은 ‘똥되지 않기’ 위한 것,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정의에의 열정도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대를 읽는 눈이었다.
지금 검찰이 검경수사권 조정 등으로 코너에 몰린 것도, 시대를 읽지 못한 검찰의 업의 결과다. 그런데 지금도 검찰이 시대를 제대로 읽기는 참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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