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구설계 신입사원에게 이걸 가장 먼저 가르친다. ‘재질’이다. 재질의 특성을 알아야 기구설계를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면 그리는 거, CAD 사용법 그건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기구설계는 대학교에 학과도 없고, 자격등도 없는 희귀한 직업이기 때문에 교과서도 당연히 없다. 그래서 내가 20년 넘게 기구설계를 하며 터득한 노하우를 어떻게 물려줄까 고민하며 생각한 제자육성의 첫 과정이 ‘재질’이라고 보면 된다.
우선, 지난번 글에 기구설계는 뭘 하는 직업인지 답을 안 적었다. 이유는 매우 복잡하다. 기구설계가 뭘 하는 직업인지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도면을 그리는 건데, 이게 기구설계의 전부를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종이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모두 화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도면을 그린다고 모두가 기구설계자가 아니다. 그래서 기구설계가 어떤 직업인지 말하려면 대략 10여편의 글을 연재해야 할 것 같다. 그 첫번째가 바로 ‘재질’이다.
기구설계자는 재질의 특성을 안다. 재질의 특성을 단순화하면 극도로 단순해진다. ‘단단하면 부러지고, 물렁하면 휜다.’ 인문학 같은 이 한 문장으로 재질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 딱딱하면 매우 강하지만 충격이 가해지면 금이 가거나 박살이 난다. 그러나 물렁하거나 질기면 최소한 깨지진 않는다.
쇠를 생각해보자. 쇠는 단단하다. 그런데 타노스가 마구 내려치니 캡틴아메리카의 방패가 박살나는 것처럼, 단단한 물질은 깨진다는 약점이 있다. 마블영화 타노스의 무기는 칼이다. 칼은 날카로워야 하는데, 무언가를 잘라내는 목적의 칼은 단단해야 한다. 그러나 방패는 잘못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막아는 건 단단하면 깨진다. 모든 집에 있는 싱크대를 보자. 싱크대는 스테인리스 재질이다. 흔히 ‘녹 안 스는 철’이라고 하는 스테인리스. 이 스테인리스는 철을 각종 첨가물을 넣어 철을 질기게 만들었다. 질기니까 깨지진 않는다. 찌그러질 뿐이지. 캡틴아메리카의 방패는 단단하기 때문에 모든 무기를 막아내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방어 목적인 방패로 공격도 가능하다. 워낙에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단단한 물질을 만나면 부서진다는 단점이 있다. 만약 캡틴아메리카의 방패를 질긴 재질로 만들었다면, 타노스가 아무리 내려쳐도 깨지진 않았을 것이다. 찌그러졌겠지.
강한 바람이 불면 나무는 부러지지만 갈대는 휜다. 이것이 바로 재질의 특징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단단하면 부러지고 유연하면 휜다. 깨지는 재질은 단단하고, 찌그러지는 재질은 질기다. 고무는 탄성이 있지만 단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무에 첨가물을 넣어 고무를 단단하게 하면 고무도 바스러진다. 이것이 바로 재질의 특징이다.
이걸 날마다 몇 달을 생각하며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물질을 대입해보는 연습을 하면 기구설계자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당신 옆에 무엇이 있는가? 모니터? 딱딱할 것이다. 망치로 때리면 박살나겠지. 단단해서 그렇다. 마우스패드? 망치로 아무리 때려봐라 깨지나. 질겨서 그렇다.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흔히 말하는 ‘지랄 총량의 법칙’을 다른 말로 ‘모든 건 플러스 마이너스 0에 수렴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불이 있으면 물이 있다. 합치면 0이 된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바로 0이다. 모든 성질은 0으로 향하기 때문에 플러스인 성질은 점점 작아져 0으로 향하고, 마이너스인 성질은 점점 커져 0으로 향한다.
그렇다. 바로 인문학이다. 기구설계자의 마지막 자질은 인문학이다. 기구설계자의 첫번째 자질인 ‘재질’와 마지막 자질인 ‘인문학’은 서로 통한다. 물질과 정신이 서로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구설계자다.
다음엔 기구설계자가 알아야 할 두 번째를 써보겠다.
2024.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