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난 조운과 염상섭

in nationallibrary •  7 years ago 

새해 첫날 휴무로 허탕쳤던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오랜만에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하며 여유를 부린 하루다. 이곳 식당 메뉴가 정갈하고 필자 입에도 맞아 늘 과식하게 된다. 가격도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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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배식제고 4,000원이다.>

도서관이 리모델링 중이어서 3층 전체 열람실이 공사 중이다 보니 4층 서가를 줄이고 열람실을 좀 늘렸다. 2층 일부를 서가 겸 열람실로 구성해 놓아 처음엔 낯선 집에 온 듯했다. 서가를 반 이상 줄인 듯한데, 자연 많은 책은 별도로 신청해서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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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2월 말까지는 3층이 폐쇄된다.>

일단 5층 북한자료센터로 올라갔다. 통일부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월~금요일만 운영하는 것을 깜빡해 이번에도 허탕이다.

서가를 둘러보던 중, 2층 문학실에서 좀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4층 서가가 줄어든 관계로 인문과학실 서가에 필자가 찾는 책들이 몇 권 정도밖에 비치되지 않았고 필요하면 신청해서 볼 수는 있지만 번거로워 2층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필자로선 주마간산 격으로 일본 소설, 독일 소설 등 서가의 제목을 훑으며 다니는데 한 곳에 『개화기 가사자료집』이 있길래 뽑았다. 필자 어머니의 고모가 지은 사언절구가 생각이 나서 몇 편을 들여다보았다.

대한제국 말 일제의 병탄정책에 앞장선 친일단체 ‘일진회’에 일침을 가하는 사언절구 「조일진弔壹進」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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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자료집』이 있는 서가 아래쪽에 『조운 평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평전으로 출판될 정도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나 볼 요량으로 집어 들었다. 그 옆에 「천재시인 조운을 아시나요?」라는 부제가 붙은 시조 해설집도 있기에 두 권을 같이 뺐다.

해방전후 한반도 공간의 극한 이념대립이 불러온 문학계의 질곡에 조운이란 시인이 있었다. 1900년 전남 영광생이고 일제시대 민족운동으로 투옥도 했으며, 고향에서 교사로 후학 교육과 작품 활동에 전념하다 해방공간의 이념 대립의 불똥으로 남쪽에서 대한민국 건국 무렵 월북한 작가였다.

경성도 아닌 지방에서 활동하던 문인이, 그것도 시조시인이었고 서정적 작품이 대표작인 그가 몽양의 건준이 발족하면서 고향 영광준비위원회 부위원장직과 문학가동맹에 가입한 연유로 미 군정 당국에 의해 ‘빨갱이’로 분류되고 말았다(『평전』의 조병무의 전반적 평가인데, 수긍이 간다). 필자의 느낌으로는, 자청해서 맡은 직도 아니고 그저 지방의 명망가다 보니 얻어 쓴 ‘감투’ 정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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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석류」는 1947년에 발표되었다. 월북 1년 전이다.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법성포12경」(1925년)이 있다.

石榴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분단상황이 가져다 온 이분법식 이념대립은 김기림, 정지용, 백석 등 월북 작가들의 작품마저 한반도 남쪽에서 금서로 만들어 버렸다. 그중에 조운도 있었던 것이다. 1988년에야 해금되어 연구가 되기 시작했으니, 아직 문학적 평가가 부족한 상황이다.

백석과 자야의 러브스토리야 다 아는 얘기고, 지용의 「향수」는 고향 옥천은 물론이고 이젠 온 국민이 다 외울 정도가 되지 않았는가! 반면, 아직 얼마나 많은 문학적·정신적 지평을 넓혀 줄 작품들이 월북이란 ‘주홍글씨’에 갇혀 외면당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조운처럼.

그러나 이렇게 향토 문인들을 중심으로 제자리를 찾는 노력이 크게 드러나지도 않고 힘겨워 보이지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매양 이분법적인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천박한’ 잣대를 가진 눈에야 ‘진주’가 보일 리 없겠지만.

인류의 지적 노력과 활동은 궁극적으로 좀 더 나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 본다. 비록 방법이, 과정이, 결과가 그렇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런 점에서 지구적 이념 실험기에 ‘내 편’이 되지 않았다 해서 지적 자산과 그 이름마저 ‘분서갱유’해 버렸던 시절이 가소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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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선 「염상섭 문학전」이 열리고 있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정도가 떠오르는 근대 작가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인 문학과는 거리가 먼 필자로선 그의 연표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였다.

그의 단편들이 실렸던 잡지 『폐허』 『개벽』 『조선문단』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들어 본 잡지여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또한 그의 유품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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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해방 전후 동아일보, 경향신문 기자로도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말이 재미있다. : “작가 생활로 원고라도 새 발의 피 같은 푼돈쯤, 가물에 콩 나기로 얻어걸려봤자 생계가 설 수 없고, 기자 생활을 하면서 창작생활을 겸무겸직으로 하자면 머리의 조직부터 달라야 하고 치질과 건강이 쬔 병아리나 골생원으로 생겨서는 안 될 일이다.”

문학전이니 육필원고와 출판사 계약서까지는 좋은데, 장교 임명장과 무공훈장 받은 것에다가 군번 줄까지 따로 한 칸을 만들어 전시하는 건 좀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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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을유문화사와의 『소낙비(驟雨)』 출판계약서인데 인세는 정가의 10%로 정하고있다. 1954년 출간되었다.>

조운(曺雲,1900~1948월북)과 염상섭(廉想涉,1897~1963)은 동시대 같은 시대적 환경에서 살았던 인물이고 같은 문학인이었으니 간접적으로나마 서로의 존재는 알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비록 조운이 지방에 있었지만 중앙지에 작품을 발표했으니 말이다.

오늘 우연이지만 중앙도서관에서 만난 조운과 염상섭은 어둠이 지고 도서관을 나오면서 올려다 본 건물 속에 나란히 있을, 같은 시대 다른 길을 걸었던 두 분이 문학으로 대화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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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카츄샤>가 생각났다.

내 편은 선善이요, 니 편은 악惡이었던 시절 우리가 그토록 미워함을 강요당했고 지구상에서 쓸어버려야 할 대상이었던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군인들이 전장에서 불렀던 노래 <카츄샤>는 무얼 말하고 있는가?

10대 후반,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왜 싸우고 죽어가는지조차 모르면서 고향의 처녀 ‘카츄샤’를 상상하며 전선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 그 심장의 피는 펄펄 끓어 올랐을 것이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그래서 카츄샤를 볼 것이라고.

이 노래는 러시아 민요이기도 하지만 소련의 군가이기도 했다. 한번 들어보자. 백발의 중년 가수와 귀여운 소녀 두엣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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