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 왜 나를 떠나는 건가요?"
공항버스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마리와 에펠탑을 보러왔을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에펠탑 앞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오래도록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볼 때조차 그녀의 투명한 눈은 먼 곳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물음이 내 마음에 추를 달았다. 쓰라렸다.
나는 언제나 도망칠 채비만 해왔었다. 한국에서도, 한국을 도망쳐 곳곳을 유랑하던 그 때에도 나는 나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쳐 낯선 곳으로 흘러가는 일에 익숙했다. 온갖 곳을 헤매며 파리까지 흘러들 동안 나는 변함없이 홀몸으로 떠났다. 파리에서 마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내 품에서 잠드는 밤이면 종종 한국의 안부를 물었다. 더 정확히는, 한국에 버려두었던 나의 일부를 궁금해 했다. 하지만 나는 매번 잠잠히 웃으며 그녀를 깊이 품안으로 안았다. 뿌리 없는 나무의 흔들림이 들킬 새라 얼른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Mon chouchou(귀여운 당신). 한국으로 가야 하는 건가요?"
"이제 Courage(용기)가 생겼거든."
"용기?"
"그래. 용기. 마리 당신을 만나니 이젠, 나에게 잊혔던 기억들을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기억?"
나는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잠시 내가 뱉은 단어를 음미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내 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Marie claire(맑은 여자). 나는 어디서부터 서랍을 정리해나갈지 골몰하며 기억의 단편으로 점점 침잠해갔다.
태어남에는 죄가 없다지만 차라리 나는 그것이 내 잘못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원죄 같은 것,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할 것의 피를 물려받은 죄 같은 것으로 인해 내 숨줄이 연장되고 끝끝내 삶의 통각으로 나 자신이 연명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 믿고 싶었다.
처음 우리 아버지가 사형수라는 것을 안 건 10살 때의 일이었다. 10살이면 알만한 것은 알아먹을 나이였고 나의 가정환경이 불우하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새엄마 밑에 딸린 세 명의 동생들은 각각 김 씨, 이 씨, 최 씨였고 그녀는 가끔은 마작을 하고 가끔 몸을 팔정도로 적당히 문란했다. 만 원짜리 서너 장이라도 생기는 날이면 그 돈으로 컵라면을 상자 채 사서 여러 날을 버텼다. 동생들은 나오지 않는 수도를 틀며 목이 마르다고 울었다.
그래도 가끔 아버지가 따뜻한 찐빵을 품에 안고 오는 날이면 우리들은 모두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허겁지겁 팥알을 집어 삼켰다. 자신들이 먹는 것이 일용할 가난인 줄도 모른 채로. 어린 것들이 주린 배를 채우는 동안 아버지는 종이컵에 흰 술을 따르며 주린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비어있는 이불. 용역을 하시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사나워졌지만 언제나 돈과 밥을 챙겨주는, 불쌍한 남자였다. 한 달에 한 번 먹을 것을 사오던 거친 손마디. 그가 발길을 끊은 후 다섯 달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여자가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고 해골처럼 마른 표정이었다. 나는 들여선 안 되는 사람임을 직감하고 문을 열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아버지 이름을 대며 우리 밥을 챙겨주러 왔다고 하셨다. 아버지 이름 석 자. 나는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한참 집안 꼴을 보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동생들은 누린내 나는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엔 가끔 새엄마가 집에 올 때도 있었기에 나만 일어나 집 정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슬픔으로 말했다.
"니가 연우냐?"
"네."
"학교는 다니고?"
"아니요. 돈이 없어요."
"엄마는 어쩌고?"
"가끔 집에 와요."
"니 애비 소식은 들었고?"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동그란 눈으로 할머니를 보았다. 그 해 여름 아버지는 붉게 물든 얼굴로 집에 오셨었다. 손은 얼굴보다 붉었다. 나는 아버지의 품속을 뒤지며 그의 주머니를 기다려봤지만 돌아오는 건 매서운 손바닥. 그의 손에 묻어있던 붉은 체액이 내 뺨에 자국을 박았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아버지 소식이 궁금했다. 나는 물끄러미 할머니의 말을 기다렸다.
"할머니. 우리 아빠 어디 가셨어요?"
주름졌지만 불매 같은 그녀의 손이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아플 새도 없이 할머니는 내 볼이며 가슴팍이며 종아리를 타박하며 어이없이 무너졌다. 나는 왜 혼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아픈 볼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할머니는 울며불며 '살인자 자식. 죽일 놈의 자식'이라고 꺽꺽 저주를 퍼부었다. 결국 볼따구가 벌겋게 부은 후에야 할머닌 나를 놔줬다. 떨리는 손으로 만원 서너 장을 쥐어주곤 가버리셨다. 빨간 손자국. 아버지의 흔적 같았다.
나는 이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10년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언성을 높이던 친구 분을 밀쳐 죽게 만들었고 죄의 대가로 빨간 이름표를 가슴팍에 새겼다는 사실을 소상히 알게 됐다. 내 혈관에 흐르는 피의 저주, 나는 새엄마도, 세 동생도 버릴 탈출구가 필요했다. 주유소에서 돈을 벌어도 새엄마에게 뜯겨먹은 날이면 교복 입은 애들을 보며 삥을 뜯어야 하는 내 인생이 비루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집에서 비로소 탈출하게 됐다. 내 인생 첫 번째 탈영은 훈련소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지옥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세상에 두 개의 지옥이 있다고 가정해봤을 때, 한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옮겨가는 건 무의미했다. 군대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 대가로 좆나게 때리는 아버지 같은 존재.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곳에서 아버지 같은 악랄한 무언가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금방 거기에 익숙해졌다. 제대를 한다고 해서 삶이 나아질 건 아니었다. 피난처로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으나 최소한 난 이 지옥에서 쨍쨍한 엄마 목소리, 아프게 눈물짓는 피해자 가족들로부터 벗어나 혼자일 수 있었다. 나의 뿌리에 대한 괴로움으로부터 분리되어 나는 군대라는 방공호에 몸을 숨겼다.
한창 제대할 생각에 뒤숭숭한 밤을 보내던 병장 무렵 나는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같이 흔들리는 듯했다.
"사형집행일자 잡혔대."
썩은 뿌리가 속아지는 그 날이 왔다.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제대를 앞둔 상황이었고 민간인이 되는 순간 모든 '아버지'를 잃게 될 운명이 됐다. 수화기 너머 동생은 흐느껴 우는 듯했지만 나는 기다림의, 존립의 위기를 직감했다. 사라질 것이다. 내가 아버지라 부르고 싶던 모든 것이 곧, 사라질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나는 형무소 앞에서 발걸음을 움츠렸다. 희푸른 담벼락을 넘지 못했던, 아무도 집행을 보러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끝끝내 불쌍한 남자는 가난과 분노의 누명을 홀로 지고 누런 줄 한 가닥에 목을 맡기게 됐다. 나는 가만히 담벼락 아래 앉았다.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이 두려움과 홀로 마주앉은 기분은 마치 검은 밤바다 위에 한 점 미동 없는 파도를 무서워함과 같았다. 세상은 별일 없이 돌아갔고 어두움을 보는 사람은 바다가 삼킬 제 몸뚱이를 위해 울었다. 나는 멍하니 아버지의 유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니 정확히는 집이 있었던 터에 돌아왔을 때 예전 집은 시민공원이 만들어진다는 명목으로 헐린 상태였고 새엄마도, 세 동생은 이미 이사 간 지 오래였다. 다음날이면 복귀를 해야 했고 나는 3주 뒤면 제대를 할 예정이었다. 머무를 곳이 없었다. 다시 혼자였다. 나는 집 앞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대로 좌석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빠르게 풍경이 지나갔고 그들도 나를 기억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또 다른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갔다. 정동진의 바다는 푸르스름한 게 꼭 괴물 같았다. 무언가를 쳐다볼 때, 그것도 너를 쳐다보고 있음을 명심하라던 글귀가 떠올랐다. 해가 지고 바다가 타락할 때까지 잠자코 모래를 밟았다. 누구나 바다 앞에선 혼자가 됐다. 가방엔 아버지의 유품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두 번째 탈영을 감행하고 있었다.
"Monsieur(신사 분). 에펠탑은 처음이신가 봐요?"
낯선 흙을 밟은 이래 나에게 먼저 말을 건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여자는 귀여운 주근깨에 파리지앵다운 멋스런 옷차림이었다. 에펠탑 위까지 올라온 프랑스인은 보기 드문데 외국인 틈에서 그녀의 불어는 능숙하기에 낯설었다.
"한국인이세요?"
"Oui(예)."
"외국분이신데 프랑스어를 잘하시네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새침하게 검은 단발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유창한 한국말로 대답했다.
"프랑스 말 잘 하시는 줄 알았어요."
"한국말 잘 하시네요."
"Non(아니요). 한국인 아버지가 가르쳐줬는데 사실 몰라요."
그녀는 이내 자신의 큰 비밀을 들킨 것처럼 쑥스럽게, 맑게 웃었다. 나도 덩달아 영문도 모른 채 피식 웃어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마리라고 소개했다.
"외국인들 올라오지만 사람들 생각해요. 에펠탑은 밖에서 보는 게 멋지다고."
"이렇게 높은 곳에서 파리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맞아요. 하지만 에펠탑 안에서는 에펠탑의 전부를 볼 수 없으니까요."
에펠탑 안에선 파리의 흐린 하늘, 잿빛 건물과 차가운 세느강이 보였다. 에펠탑 전부를 보려면 이곳을 나와야만 했다. 아직 내 인생에서 어느 것도 제대로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겨우 25살이었다.
"괜찮다면 밖에서 에펠탑을 볼래요? 커피나 한 잔하면서요."
"모르는 여성분이랑 그런 적이 없어서요."
"여긴 파리에요. 파리에선 어떤 사랑도 어느 순간 찾아오는 법이죠."
나는 당돌하지만 어눌한 그녀의 발음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는 웃기만 하는 나를 보며 살짝 무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짧은 눈대중으로 읽었던 프랑스어 책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On peut marcher ensemble?(같이 걸을래요?)"
"맞아. 연우. 그때 너무 짓궂었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녀의 솔직함은 항상 나를 웃게 만들었다. 내가 내 손으로 쓴 주홍 글씨. 그걸 모른 채 쓴 뿌리를 속아내지 못했던 수년의 시간이 허무해질 정도로 그녀는 나를 단단히 지켜줬고 오래도록 견뎌줬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5년을 뒤로한 채 한국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리는 지금 그런 나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Mon cheri(자기). 그래서 한국에 가면 뭐 먼저 하고 싶어?"
"음....... 우선 가족들을 만나봐야지."
"괜찮아요?"
"글쎄. 어이없게도... 괜찮을 것 같아. 얼마 전에 동생이랑 연락이 닿아서."
"연우. 당신이 가족을 되찾은 거 같아. 나는 좋아."
‘되찾았다‘ 나는 그 말을 혼자 되뇌었다. 그녀도 한참동안 같은 말을 생각해보다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여름 하늘을 담은 맑은 얼굴로 그녀는 나의 영혼까지 바라보는 듯 했다.
"Vis ta vie.(너의 삶을 살아.) 과거도 현재도 결국, 오늘의 몫이야. 괜찮아질 수 있다면 예전의 시절과도 화해할 수 있을 거야."
".......... 고마워, 마리."
"휘둘리지 말고 당신 뜻대로 살길 바래."
모두 괜찮아지면 돌아오겠다는 나의 약속에 마리는 새침하게 웃으며 자기는 파리의 여자라고 말했다. 파리의 여자는 사랑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그녀가 나를 기다릴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미 믿고 있었다. 마리는 가볍게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무언의 응원과 기도를 담은 입맞춤. 오래도록 나를 걱정하는 눈맞춤이 나를 더 강인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뿌리내릴 새로운 지구를 발견한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부인하지 않아도 되는 그 곳에서 마시게 될 새로운 공기. 지나쳐온 길을 용서하고 서있는 자리를 사랑하며 나아갈 표지판을 용기 있게 바라봤다. 지키고 싶은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참아줌으로, 나를 견뎌줌으로 인해 행복했던 5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나는 떠난다. 내가 버리지 못할 옛날과 안쓰럽게 웅크리고 있을 어린 나를 만나기 위해. 여자는 나를 뜨겁게 안았다. 마치 나의 두려움을 아는 듯. 용기를 잃을 때마다 그녀의 포옹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소담한 그녀의 어깨를 더욱 굳건히 끌어안고 말했다.
"기다려. 마리.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Lady. Qu‘est ce qu'il se passe?(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엘레나는 사흘간 앓아누웠다가 겨우 서점을 열었다. 오래된 종이의 매캐한 곰팡내와 먼지가 쌓인 LP판은 한 상자씩 쌓인 채 서점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그런 오래된 내음을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몸과 마음이 아스라한 지금의 상태론 서점을 열어놓기도, 그 앞에 앉아 시간을 견디기도 힘에 부쳤다. 홀로 고독할 수 있는 순간마저 박탈당한 지금, 그것을 겪게 만든 연인의 기억은 그녀의 폐부까지 썩히며 들어왔다. 관계에서 가해자는 없었다. 언제나 무수한 피해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힘없는 자, 혹은 가장 많이 사랑한 자가 가장 큰 십자가를 지게 되는 법이었다.
아이가 들어섰다는 말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가 어이없이 화를 내거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웃어넘기면 좋을 텐데 그는 엘레나의 간절한, 그리고 불안한 표정에도 미동조차 없이 벽면만 응시했다. 생각의 끝자락에 자신을 바라볼 것이란 기대가 얼마나 어린 것인지 알기에 엘레나는 그가 자신만의 결론을 내릴 때까지 침묵을 견뎠다.
사실 그가 없이도 아이를 낳아 기를 신념이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아비보다 더 훌륭하게 자라 파리라는 도시에서 멋지게 성장할 아기이기에 남자가 머무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그를 꽤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의 약혼녀가 그를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아이를 지워달라는 말만 남긴 채 커다란 가방과 함께 집을 나갔다.
어떤 선택이든 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파리에 머문다는 그녀의 서점에서 그녀를 그리며 파리 대학에서 계속 그림을 공부하면 됐다. 엘레나는 여전히 그가 왜 자신을 떠나야만 했는지, 왜 아이를 부담스러워했는지 이해가 안됐다. 몇날 며칠을 아파하면서 그녀는 결국 마음의 확신을 따라 아직 심장도 생기지 않은 태아를 키우리라, 혹여나 그것이 그에 대한 복수일지라도 그것을 품어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다짐에 도달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힘을 쏟았고 진이 빠진 그녀는 서점 문만 겨우 연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오늘은 많이 우울해 보이셔서요.”
“제가요?”
“예. 요 며칠 서점 문도 안 여셨고. Puis-je vous aider?(무엇을 도와줄까요?)”
매일 아침 9시 정각에 잡지를 사가는 남자가 있었다. 물론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동양인이었지만 1년 넘게 서점을 들르는 그에겐 알 수 없는 친근함과 맑음이 있었다. 그녀의 안색을 걱정하는 그의 표정을 살피던 엘레나는 잠시 낮고 작게 웃었다. 자신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 아비는 없다는 것, 그래도 낳겠다는 말이 이다지도 쉽게 나올 수 있다니. 그는 잠시 당황하는 눈치였고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어떤 위로의 말이나 조언을 건네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동양 남자 특유의 배려 때문이리라. 엘레나는 스러져가는 기억을 또렷이 응시하고 그것을 차곡차곡 개켜두고자 노력했다. 그 때 말이 없던 손님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딸이면 좋겠네요.”
“Quoi?(네?)”
“당신을 닮은 딸이면 참 예쁠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래도록 딸이 생긴다면 그 애 이름을 마리라고 짓고 싶었죠.”
“왜 ‘마리’죠?”
“그냥요. 예쁘잖아요. 당신처럼.”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현준이라고 했다. 또한 그가 맡은 사업은 6개월 전에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파리에 머물며 몽마르트 중턱의 조그마한 서점에 온다고 말했다. 엘레나는 어떤 감정의 천천히 젖어 들어감을 느꼈다. 이듬해 엘레나는 여자 아이를 낳았고 아이에게 ‘마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계획대로, 상상한대로 삶이 이어져간다면 오죽 좋을까. 하지만 마리는 15살의 어린 나이에도 삶이란 녀석이 마냥 녹록치는 않음을, 때론 예고편과 다른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그 나이에 가족묘를 장만해야 했던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왔을 때에야 마리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웃집에 살던 쟝과 니꼴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마리에게 달려왔다. 마리는 당장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찌그러진 범퍼, 흘러넘친 핏물과 하얀 천 두 장 앞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장례가 끝나고 가족묘를 꾸미며 마리는 묘 가장자리에 황수선화를 심었다. 아빠는 가끔 엄마와 마리에게 그 꽃을 선물했다. 샛노란 꽃봉오리에 엄마는 소녀처럼 웃었다. 마리는 차가운 땅 아래 영문을 모른 채 누워있을 두 사람을 떠올리며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쟝이 차를 가지러간 사이 니꼴은 마리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니꼴의 파란 눈에서 나온 파란 눈물이 마리의 검은 머리를 적셨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마리를 보며 쟝과 니꼴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입을 다물었다. 식탁엔 팬케이크가 올려져있지만 아무도 먼저 포크를 들지 못했다. 이미 식음도 전폐한지 이틀째, 마리는 어이없음을 위해 흘릴 눈물조차 삼켰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쟝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한 술이라도 먹으렴. 하늘에 있는 니 부모가 울겠다.”
“.......................”
“그래도 15살이니 떠먹여주긴 민망하구나. 니꼴, 우리 루이도 이만한 나이 때 참 말을 안 들었었는데 드디어 우리도 마리의 사춘기를 보는구먼.”
“쟝. 그래도 루이가 마리보다 더 심했어.”
“Oui. 루이 녀석도 성격이 별나가지고 고생 좀 했지. 결국 오토바이를 잘못 몰아 저세상에 갔지만.”
마리는 동그란 눈으로 쟝을 바라보았다. 쟝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그 땐 니꼴도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 하지만 너희 부모님이 매일매일 찾아와서 같이 밥도 먹고 청소도 하고 영화도 보러 나가고 그랬지. 물론 우리 둘 다 무지하게 싫은 티를 팍팍 냈지.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어. 억지로라도 밥을 먹이고 말을 걸고 손을 잡아줬어. 현준과 엘레나는 그런 사람들이였지.”
쟝은 거의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추억에 잠겼다. 마리는 그제야 처음 들어보는 부모의 모습, 하지만 자신에겐 너무나 익숙했던 그 따뜻함이 떠올라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었다. 니꼴도 마리를 따라 훌쩍이며 마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우리 집 다락에서 살도록 해라. 절대 공짜는 없어. 아침에 나와서 식사도 만들고 학교 다녀오면 집 청소도 하고 방학 땐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족 여행비에 보태도록 해라. 알겠지, 마리?”
“.................................”
“가족 여행 경비에 보태라고 말했다. 우선 케이크를 먹고 같이 다락방 청소 좀 하자꾸나. 루이가 죽은 이후론 아주 가끔만 청소를 해서 먼지가 알프스급이야.”
“그래. 마리. 우선 같이 식사부터 하자. 사실 배가 고팠거든.”
마리는 힘겹게 포크를 들어 팬케이크를 뜯었다. 그것을 입에 머금고 오물오물 씹었다. 단맛이 입 군데군데로 번지며 흐물흐물 소화됐다. 마리는 그것을 겨우 목구멍으로 삼키고 이내 꺼이꺼이 눈물을 게워냈다. 하지만 더욱 단단히 포크를 잡고 케이크를 씹었다. 니꼴도 같이 울며 샐러드를 먹었다. 식탁이 온통 울음바다였지만 어느 누구도 먹기를 멈추진 않았다. 마리는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이불빨래를 하고 부부와 함께 다락 먼지를 닦아냈다. 가끔씩 멈춰 서서 울다가 이내 걸레를 들고 방바닥을 밀었다. 그런 마리를 보며 니꼴도 몰래 눈물을 훔쳤고 쟝은 부엌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대령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시린 바람이 틈탈 새 없이 집은 새로운 가정을 품기 시작했고 파리의 스산한 겨울을 이겨낼 온기를 머금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새엄마란 여자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이미 둘째 동생에게 들은 터였다. 메시지를 통해 나는 동생에게서 나름의 절절함과 동정심이 느껴졌다고 믿었다. 흰 이불에도 가리지 못할 시커먼 발이 눈에 어른거렸다.
한국에 들어온 후에도 나는 한동안 병원의 흰 담벼락 앞에 머뭇거렸다. 모종의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죽도록 미워했던 것이 내 허락 없이 떠나가는 일에 난 여전히 익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서른이었고 그런 일방적인 통보에 익숙해지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더 이상 스무 살적의 나처럼 두려워 떨지 않았다. 도리어 느닷없음에 익숙해진 나의 무심함에 당황할 뿐이었다.
오랜 시간 자신의 환경에 길들여진 사람은 그 환경의 부조리함조차 무디게 받아들이는, 오히려 그것을 옹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당위를 합리화했다. 공항에 나온 남자, 박철의 모습은 영락없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는 사채라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였고 이십대 답지 않은 능글맞은, 혹은 역한 처세술을 갖고 있었고 나를 형이 불렀지만 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를 만나자마자 하는 말에서 그는 나를 부른 목적을 실토했다.
"형. 제가 이런 거지같은 환경에서 살다보니 돈도 없고 깡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힘들어봐서 이정도로 성공한 거죠잉. 이런 삶도 썩 나쁘진 않아요. 근데 어머니 병원비가 문젭니다. 저 힘들게 살아온 거 아시잖아요? 제가 돈이 어디 있겠어요? 저도 마음이 찢어지지만... 그래도 형제 좋다는 게 이런 거다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그가 술상에서 씨부리는 말들이 귓등으로 흘러 넘어가며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게 됐다. 그 여자도 죽는다. 나는 파리에서 단단히 부여잡던 심지가 타 들어 갈까봐 얼른 빈 술잔을 채웠다. 다 알겠다는 나의 말에 그는 얼씨구나 신나는 표정을 감추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빠듯하게 살다보니... 죄송합니다, 형. 병원비가 밀려서 병문안도 못 가요. 어휴. 형이 다 처리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의 믿음의 그의 가벼워진 발걸음만큼 옅은 진심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부터 쓰디쓴 역사를 고쳐가야 할지, 그 아득함에 짓눌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망설임 끝에 드디어 병원 앞에 나 자신을 끌어놓을 수 있게 됐다.
새엄마라는 여자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진 못했다. 의사의 말론 암세포가 눈, 간, 폐 등 온 곳에 퍼졌다고 진단했다. 늙은 여자는 말라비틀어진 눈꺼풀로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서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녀가 낳지 않은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래... 10년 만에 보는 건가?"
여자의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링거 외엔 어떤 것도 섭취하지 못하는 몸뚱이에선 피 같은 누린내가 났다. 여자는 희끄무리한 눈동자로 초점 없이 곁에 서있는, 이미 다 커버린 아이의 형상을 지켜봤다. 그녀는 내가 내 애비를 닮았는지 궁금한 듯싶었다.
"많이 아프시다 들었습니다."
"너도 알잖니? 너가 니 애비를 닮아서 싫어했다는 거."
"약도 거부하시고 항암도 안 받으신다면서요."
"이젠 피곤하구나. 등골 빠지게 대줘도 손에 남는 건 내가 번 돈의 먼지 한 줌뿐이야."
"다시 치료받으세요. 병원비는 제가 댈게요."
그녀는 경멸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녀의 주머니를 탐하던, 그녀의 여성을 착취했던 수많은 남자의 이미지를 나에게 더하고 더하면서 서늘한 농담을 건넸다. 애비랑 똑같구나. 10년 새에 더 늙고 더 병들었으며 더 거칠어진 수세미. 걸레가 돼버린 몸과 마음으로 누워 그나마 할 수 있는 악다구니로 남자를 후려갈기는 모양이 묘하게 측은했다. 그녀가 곧 있으면 죽을 것이라는 이유로 나는 이 여잘 용서해야하는 걸까? 여자는 연거푸 기침을 하다가 마취제에 취해 잠에 빠져들었다. 이미 그녀에게 깨어있음과 죽어있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듯했다.
냉장고 청소에 분갈이까지 마치고 돌아서보니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발이 눈에 들었다. 망자의 것처럼 시커멓게 물든 발가락 군데군데마다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어 흉하게 바래지고 있었다. 씻은 지 오래됐는지 발등부터 뒷목까지 튼 살로 인해 그녀의 발은 시커먼 벽에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발은 죽음을 원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쉼을 원했다.
그 날 밤, 마리에 대한 꿈을 꿨다. 더 정확히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꿈꿨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못난 발을 침대 속으로 숨겼다. 오래 서있어야 하는 그녀의 직업으로 인해 그녀의 발은 퉁퉁 부어있었고 구두에 부대껴 굳은살이 자글자글했다. 기억 속의 밤, 나는 그녀의 발에 내려진 금기를 거부하고 그녀의 발가락에 입을 맞췄다. 마리는 강인하게 삶을 이어온 거친 무게를 그녀의 발 위에 감당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가 숨기려는 슬픔으로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 그 밤의 키스,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는 몸 속 깊이까지 각인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의 발이 당신을 말해주고 있는 거 같아.”
하지만 꿈에서 깨면 여전히 병원의 하얀 벽. 그녀는 없었다. 한 달이 다 돼가도록 병원에 하릴없이 머물러도 늙은 여자는 퉁명스러웠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화분에 물을 주거나 식사를 종용하는 나에게 새엄마는 순순히 따랐다. 어쩌면 그동안도 모든 남자에게 쉬이 마음을 열 정도로 외로운 여자였는지 모른다.
"기분이 좋구나. 산책을 못 하는 게 아쉬워."
이미 그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음에도 여전히 바깥세상을 흠모했다. 늙은 닭이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고 계장에서 햇살을 맞으며 죽음을 기다리는지도. 하지만 닭은 자신의 죽음에 관심이 없다. 산책을 허락하지 않는 나에게 한껏 꼬라지를 내곤 그녀는 순순히 약을 먹고 잠에 취했다. 마취제가 그녀 속에 자라는 죽음을 안식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새삼 그것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봤다. 그녀의 말처럼 산책하지 못해 아쉬울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맑은 날. 나는 마리가 보고 싶었다. 그 날의 꿈, 그녀의 발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정리한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의 그리움을, 사무침을 삼키며 하늘만 바라보았다. 파리의 하늘과 결국 똑같은 하늘.
"미안하구나."
약 기운에 취했는지 새엄마가 허공에 대고 말을 했다. 초점 없는 멍한 눈. 쇳소리로 헛소리를 지껄이며 약기운이 더욱 빨리, 깊이 퍼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픔을 방증하는 듯 했다. 그녀는 연우라는 단어를 여러 번 곱씹었다.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그녀의 입술에 내 이름이 처음 올라 선, 그 기분을 누군가 이해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서늘함으로 그녀의 눈동자를 봤다. 무의식 속에서 헤매던 새엄마의 눈에선 짠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살아서 미안해."
여자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눈물을 떨궜다. 아마 제정신으로 하는 얘기들은 아닌 듯했다. 미안하다는 말, 괜찮다는 말. 나는 여느 때처럼 미리 받아놓은 물동이에 수건을 적셔 그녀의 발을 닦았다. 3주간의 노력 끝에 튼 살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시커먼 죽음의 색깔은 지워지지 못했다. 그녀도 자신의 발을 숨기려했으므로 그녀가 약기운에 취했을 때만 발을 닦아드렸다. 생각보다 작고 가냘픈.
그녀의 발에서 마리의 것을 떠올린 건 기괴한 일이었다. 묘한 오버랩으로 그녀의 발이 이고 온 무게와 갈라진 살결 속에서 맑은 여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증거가 녹아있었다. 새엄마가 아버지에게 겁탈 당했을 때 그녀는 22살이었다. 어린 여자는 궂은 삶을 연명하고자 순수성을 팔았다. 사세요. 제 삶을 사세요. 그녀의 발은 코끝에 매달린 숨을 끊지 못했고 다만 닻의 무게에 끌려들지 않고자 수면 위에서 안간힘을 썼다. 결국 마리의 발과 본질적으로 같은.
"비가 오는 거 같구나..."
"제가 발을 닦고 있어서 그래요."
"비가 오면... 항상 꽃이 보고 싶어."
그녀의 마음은 잃어버린 초점만큼 그 길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혼잣말로 비가 오면 꽃이 폈으면, 꽃이 피면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들. 내가 새 수건을 가져왔을 때 새엄마는 발작을 일으키다가 간성 혼수로 정신을 잃었다. 의사들이 여러 차례 오갔고 이런 저런 기계들이 그녀의 몸에 붙여졌지만 들려오는 소리를 단 하나의 음정뿐이었다.
여자는 꽃이 보고 싶었고 돈을 벌어야했다. 이제 그녀의 발은 더 이상의 노동 없이 안식을 맞이하게 됐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분주함이 병실을 가득 채웠지만 드디어 그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제 평생을 두고 그녀를 용서해나갈 일뿐. 아직은 어느 것도 제대로 사랑할 수조차 없다. 지난 시간과 뜨겁게 화해하자던 다짐은 시간에 묽혀 그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시침은 이제 막 8시를 향해 있고 가을 해는 파리의 우기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점점 더디 오는 여명과 오히려 빠르게 스치는 가을바람에 이부자락을 끌어올리고 한숨 더 자고 싶어지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검은 상복이 즐비한 공간 속에서 나는 마리가 이불 속에 누워있을 모습을 애써 상상해보았다. 마리는 오랜만의 주말 휴가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울리는 전화에도 깨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 속에 깃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현 듯 이 전화가 그녀를 기다려온, 그녀가 기다려온 것이라는 예감에 그녀는 부스스 몸을 일으킬 것이다. 부스스하게 헝클어져있을 머리카락. 나는 여러 번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리. 나야.”
내 목소리는 피로에 빻아져 가늘게 흩어졌다. 한 달만의 전화였다. 나 자신의 기억과 해우하기 위해 파리를 떠났던 목소리엔 축축한 비애가 젖어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종류의 한을 떠올릴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혹여나 옛것이 될 상처를 지금의 것으로 안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안쓰러움이 피어올랐다.
“기분 탓이라면 좋겠지만 당신 목소리가 슬퍼.”
“오늘 장례식을 마쳤어. 어머니 장례식.”
“내가 가봤어야 했는데. Desolee.(미안해.)”
“목소리 들었으니 됐어. 괜히 아침잠을 깨웠군.”
“Non. Au contraire, merci.(오히려 고마워.) 날 기억해줘서.”
나는 재를 뿌린 곳을 찾아가야만 아비를 기억하는 일이 허락된다는 사실을, 한 줌조차 남지 못한 죄인의 싹에게 원죄의 씨앗을 기리는 일은 모종의 죄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화해는 불가사의했고 용서는 아득히 먼 일. 마리는 몽롱한 아침에도 정중히 경청했다. 나는 부모를 한 곳에 흩은 귀로에서 과거의 불행과 온전히 헤어지고 싶었다. 소망은 삐걱대는 활주로 위에 위태로이 걸음을 지탱하고 있었다. 나를 걱정할 그녀를 알기에 더더욱 울먹이는 자신을 말없이 달랬다. 모든 순간마다 보고 싶었다는 내 말에 마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짐했던 것들이 다 엉망이 된 기분이야.”
수화기 너머로 한 음절씩 생각하며 어떤 마음을 전할까 고민하고 있을 그녀의 입술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의 힘듦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자신의 비좁음이 그녀를 지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책하면서도 그녀를 안고 싶어 하는 욕망을 품는 이기심은 한꺼번에 모든 탯줄을 거세당한 당혹감 앞에서 피로를 느끼는 이성이 견뎌야할 책무일 뿐이었다.
“당신에게 쓴 물을 뱉어서, Desole de vous blesser.(아프게 해서 미안해.)”
마리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는 이미 그를 처음 봤던 에펠탑에서부터 그를 마음으로 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동정도, 연민도 아닌 살핌으로 그를 대하리라. 힘들어 넘어진 채 다시 일어설 수 없던, 느닷없는 우연의 순간들로 꾸려지는 삶의 단상. 그 속에서도 하늘은 단비를 내리고 나무는 고양이에게 그늘을 선물한다. 마리는 모두 이해할 순 없다 해도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음에 완연히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를 일으켰던 손길처럼 다시금 누군가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그녀는 기꺼이 그와 함께 아파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것.
이 이야기가 마냥 행복한 결말을 가졌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불가피한 정답이다. 박철은 나에게 굳이 약속을 받아내면서도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그에게 있었던 인간적인 양식이 퇴화된 흔적으로나마 감지되고 있다는 의미인지 모른다. 거기에서 어떤 희망을 읽었다면 내가 너무 낙관적인 탓일까.
“정말 나중에 딴 말하지 마소. 형 말, 제가 백 번 믿고 있는 거요.”
그는 유산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상속권을 포기하는 나를, 선뜻 자신에게 선의를 베푸는 나의 저의를 알지 못해 불안해했고 그가 준비해놓은 논변이 무용해졌다는 사실에 멋쩍어했다. 아무 상관없었다. 나는 내가 받은 만큼 행했다. 발인을 마치는 대로 박철은 조의금 봉투를 모아 가방에 챙겼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박철은 혼잣말을 주절댔다. 나도 원래 이런 놈 아니라는 메아리. 박철은 그가 살아낸 삶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박철의 어깨를 토닥이고 그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이 관계의 목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 그의 쓴 뿌리와 화해하지 못했고 새엄마를 용서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리로부터 받은 깊은 사랑에만 뿌리내려 언제까지고 그녀를 외롭게 할 순 없었다. 그녀를 홀로 남겨두며 다짐했던 무수한 계획들이 함께 비행기를 못 타지 못하고 발인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등 근처에도 비치지 않았다. 12시간의 오랜 비행,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시간을 기다리며 해결해야할 문제이며 애초에 그것을 단기간에 빨리 해치우고자 했던 나의 어리석음, 혹은 무례함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긴 통화를 마치며 마리는 내게 말했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만큼 살았을 뿐이었다. 계획한 일, 당연하게 여긴 일들은 어긋나곤 했지만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고.
"난 당신을 사랑해. 진실은 그것뿐이야.”
거친 착륙만큼 거칠게 지나치는 삶의 속도에 때론 새치기당해서 당혹스런 마음. 절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끝이 아니며 세상엔 지치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있었다. 나에겐 이제 받고 느끼고 도로 되갚음으로 속도를 되찾는 일이 필요해졌다. 매우 느리지만 결국 해낼 해후. 마리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고 깊은 잠은 꿈이 없어도 꿈을 꾸었다. 샤를 드골 공항에 비행기가 내리고 까다로운 심사대를 거쳐 저기, 마리가 기다리고 있을 문이 보였다. 심호흡. 파리의 공기였다. 그녀가 근처에 있었다. 다시금 힘찬 걸음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설렘을 애써 감춘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었다. 나는 그 뒤에 다다라 나직이 속삭였다.
“다녀왔습니다. 마리(Maria).”
2014년 #쮼
이야... 4년 전에 쓴 글이요. 나름 단편을 써겠는 목표로 조각조각 썼는데 지금 보니 조금 부끄럽긴 하네요 ㅋㅋㅋ 그래도 원고 80매를 채웠던 경험이 떠올라 숨겨뒀던 흑역사(?!)를 정리해 올려봅니다 ㅎㅎㅎㅎㅎ ㅠㅠㅠ
기자님 안녕하세요. 한국어 컨텐츠는 기본적으로 맨앞태그에 kr을 추가하면 많은 분들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입 초기에는 kr-newbie라는 태그도 추가해주시면 좋습니다. 금방 익숙해지실 것 같네요:)
정말 장문에 잘 정리된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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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그렇군요!! 한국어 쓰시는 개발자분들 글은 자주 접했는데 좋은 태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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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다른 분의 소개로 들어오신 건가요?? 저도 단편 소설을 쓰고있는데 너무 어려워서 지금 접어놓고 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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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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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 관련 취재 및 공부를 하다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었네요:) 저도 시간이 많은 학생 때는 자주 끄적였는데... 지금은 일로 글쓰기도 벅차네요 흑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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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글에 빠져서 넋놓고 스크롤을 계속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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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감사합니다 헤헤.. 너무 예전 글이라 공개하기가 민망스러웠지만 용기를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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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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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해 <- 이것도 태그인가 보군요! 스팀잇 커뮤니티 흥미로우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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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소망 릴레이의 다음 주자로 지목되셨습니다. https://steemit.com/kr/@joeuhw/2018-3 글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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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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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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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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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춥고 피곤한 출근길에 활력이 되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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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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