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계절이 찾아왔다. 반팔이 더는 어색하지 않은 날씨. 요즘은 지구 온난화니 뭐니 해서 더위가 너무 빨리 찾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담이의 손가락은 늘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날씨 탓인지 몰라도 요즘 담이의 손가락은 어느 때보다 더욱 붉어보였다. 마치 뜨거운 태양볕에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담아-!"
"어? 아, 은실아! 오늘은 좀 늦엇네?ㅎㅎ"
"맨날 내가 너 기다리잖아. 재미 없어서 일부로 좀 천천히 왔지."
담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교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스쳐지나가며 조용히 던진 한 마디에 귀가 움찔거렸다.
"뭔 손가락이 저렇게 빨개?"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려 담이를 보았다. 혹시나 들었으면 어떻하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담이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담이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 했던 것 같다. 담이의 큰 눈이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왜 그래?ㅎㅎㅎ"
"아, 아니. 그냥... 오늘따라 날씨가 어째 더 더운 것 같냐?"
"그지?ㅠㅠ 요즘 아주 푹푹 찐다 쪄!"
교실로 들어서니, 반장이 칠판 위에 시험 D-Day를 적고 있었다.
"헉ㅠ 담!!! 시험 언제지?"
"시험? 다다음준가?"
"뭐?ㅠㅠ 망했다...흑ㅜ"
"ㅋㅋㅋ그러게 미리 미리 공부 좀 하지 그랬어. 내가 과목별로 정리 노트 만들고 있으니까, 나중에 빌려줄께."
"담아... 너 천사지? 맞지?"
"ㅋㅋㅋ뭐래~ 아 맞아, 그리고 시험 끝나면 수학여행 가잖아! 벌써 기대된다!"
"우리 학교는 뭔 수학여행을 방학 전에 가냐?"
"낸들 알아? 교장 맘이겠지 뭐~"
시험이라니...!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럴 때, 담이가 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담이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말하길, 담이는 작년 반에서 꽤나 공부를 잘 하는 편에 속했다고 한다. 그런 담이와 내가 친구라니...! 늘 뒤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나도 이번엔 공부 좀 해보는 건가?
"그런데 수학여행 어디로 가?"
담이가 물어왔다.
"제주도!"
"우와, 비행기 타는 건가? 비행기라... 봉숭아 가지고 탈 수 있겠지?"
"뭐?! 너 수학여행 가서도 봉숭아물 들이려는 건... 설마, 아니지?"
"맞아. 난 들일꺼야. 봉숭아물! 들여야만 해."
"어휴- 그래. 어찌 말리겠니 너의 그 봉숭아 사랑을!"
'아니 얘는 무슨 수학여행을 가면서까지 봉숭아물을 들인다는 거지?'
평소에도 가끔씩 담이는 봉숭아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주말에 가족 여행을 갔을 때도 봉숭아물을 들이려고 챙겨둔 실을 엄마가 실수로 버렸다는 이유로 여행 내내 짜증이 가득한 카톡을 보냈던 담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삼아 봉숭아물을 들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치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불문율처럼 봉숭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하다.
담이는 왜 그리 봉숭아물을 고집하는 걸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다. 하지만 봉숭아라는 단어를 꺼내기만 해도, 담이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어쩌면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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