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먼트 바에 애착이 있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한가지에 대해 적어 본다. 내가 피그먼트 바를 사용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직관성이다. 여기서 직관성은 드로잉에 가까운 즉발적인 표현력 뿐만이 아니다. 방금 그린 그림과 시간이 지나 다시 본 그림은 물리, 화학적으로 다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회화의 현전엔 언제나 축적된 다면의 시간이 있다. 물감이 말라간다는 것은 사실 기름이 산화하는 것인데 편의상 마른다고 표현하겠다. 마른 물감은 결국 마르기 까지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그 변화가 불러 일으키는 숭고는 제법 강렬하다. 따라서 재료를 잘 파악하고 마르는 정도를 어느정도 고려해 그림을 그리면 그림을 보게 됐을 때 지각 가능한 하나의 감상 층을 더 쌓을 수 있는 셈이 된다. 피그먼트 바는 3일 내에 거의 마르는데, 30일 즈음 지나면 벌써 약간의 수축이 시작된다. 이런 변화는 캔버스 위에 복잡하게 얽힌 색상들을 더 단단히 붙들어 견고해 뵈도록 하고, 수축하면서 생긴 미세한 주름과 단단하고 날카로워진 표면이 조형적인 밀도를 약간 높여준다. 이러한 효과는 액체 유화 물감을 사용해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으나 유화의 경우에 워낙 더디게 마르기 때문에, 3년 정도는 지나야 눈에 띄는 수축이 있다. 뚜렷한 수축이 일어난 후에 다시 물감을 얹는 작업도 제법 흥미로운 표현의 방법이다. 하지만 유화로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역시 그런 실험은 거듭하기 어렵다. 표면이 어느정도 말라 안정된 상태까지 내가 그린 회화를 천천히 확인해 보는 과정은 사실 꽤 중요한 경험이다. 우선, 내가 나의 그림을 더 책임질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볼 기회가 될 수 있다. 훗날, 복원이 이뤄진다고 해도 가능하다면 그 양을 최소화 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할 것이다.
#박스가생겼다
피그먼트바를 구할 수 있는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