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소설처럼
존 펜들턴은 웃으며 폴리애나를 맞이했다.
“폴리애나, 넌 정말 너그러운 아이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다시 날 보러 오진 않았을 거야.”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펜들턴 아저씨. 전 여기 오는 게 정말 기뻤어요. 안 그럴 이유가 없죠.”
“글쎄, 네가 친절하게 젤리를 가져다주었을 때도 그렇고 내가 다리를 다쳤을 때도 그렇고, 난 너에게 화만 냈잖니. 그리고 너에게 고맙다는 말도 한 적이 없지.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도 날 보러 오다니 정말 착한 아이야!”
“하지만 전 아저씨를 찾아서 기뻤는걸요. 그러니까 아저씨 다리가 부러진 게 기쁘다는 게 아니고요.” 폴리애나가 급하게 말을 정정했다.
존 펜들턴이 웃었다.
“그래, 알아. 어쨌든 고맙구나. 그날 네가 한 행동은 정말 용감했지. 젤리도 고마웠다.” 그가 가벼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맛있게 드셨어요?” 폴리애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아주 맛있었지. 오늘은 안 가져왔겠지? 폴리 이모가 보내지 않은 걸로 되어 있는 것 말이다.” 그가 묘하게 웃으며 물었다.
폴리애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안 가져왔어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펜들턴 아저씨, 제가 지난번에 폴리 이모가 젤리를 보낸 게 아니라고 말한 것은 실례였나요?”
대답이 없었다. 존 펜들턴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폴리애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신경질적이고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이렇게 우울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널 부른 게 아닌데. 들어 보렴! 서재에 가면, 전화기가 있는 큰 방 알지? 벽난로 근처 구석에 큰 유리장이 있단다. 거기 아래 선반에 조각된 상자가 있어. 저 성가신 여자가 다른 곳에 정리해 두지 않았다면 아마 거기 있을 거야. 그걸 내게 가져다주렴. 무겁지만 들 수 있을 거다.”
“전 힘이 세요.” 폴리애나가 일어서며 쾌활하게 말했다. 잠시 후 그녀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 후 30분은 폴리애나에게 아주 멋진 시간이었다. 상자는 보물들로 가득했다. 존 펜들턴이 몇 년 동안 여행하며 모아온 골동품들이었는데 하나하나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었다. 중국에서 가져온 정교하게 조각된 장기짝(장기를 두는 데 말로 쓰는 나뭇조각)이라든지 인도에서 가져온 작은 옥 불상 같은 것들이었다.
불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폴리애나는 낮게 속삭였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다고 믿는 지미 빈을 맡아 기르는 것보다 하나님이 저런 인형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인도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인도 아이들만큼 지미 빈도 생각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존 펜들턴은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또다시 그의 시선이 저 먼 곳에 머물렀지만 무언가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는 다른 골동품을 들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방문은 분명 무척 즐거웠다. 하지만 폴리애나는 이들이 상자 속의 멋진 골동품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폴리애나나 낸시, 폴리 이모, 그리고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오래 전 먼 서부 고향 집에서 지냈던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윽고 폴리애나가 돌아갈 시간이 되자 그 딱딱하기만 하던 펜들턴이 폴리애나가 전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자주 와 줬으면 좋겠구나. 그럴 수 있니? 나는 외로워서 네가 필요하단다. 또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건 나중에 얘기하마. 처음에 네가 누군지 알았을 때는 널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단다. 넌 내가 오랫동안 잊으려 했던 것을 떠오르게 하거든. 그래서 널 다신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 의사가 널 데려와도 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난 안 된다고 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난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단다. 널 못 본다는 사실이 내가 그토록 잊으려 하는 모든 것을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게 했지. 그래서 이젠 네가 와 줬으면 좋겠구나. 그래 주겠니?”
“그럼요, 펜들턴 아저씨.” 폴리애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슬픈 얼굴을 하고 베개 위에 누워 있는 남자가 안쓰러운 듯,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전 이곳에 오는 것이 정말 좋아요!”
“고맙다.” 펜들턴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폴리애나는 뒤뜰 현관 앞에 앉아 낸시에게 존 펜들턴의 멋진 상자 이야기며 그 안에 담긴 더욱 멋진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그 사람이 그런 것들을 보여 주고 이야기도 해 주다니 정말 놀랍네요. 그는 너무 까다로워서 아무 하고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요. 아무하고도요!”
“하지만 그분은 까다롭지 않아요.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폴리애나가 열심히 펜들턴을 두둔해 주었다. “왜 모두가 아저씨를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저씨를 알게 되면 그렇지 않을 텐데. 하지만 폴리 이모조차 그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젤리를 가져다주는 것도 싫다고 하고, 자기가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라고 했어요!”
“펜들턴 씨의 일은 자신의 의무가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낸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어쩌다 그 사람이 아가씨를 그렇게 좋아하게 됐는지 이해가 안 돼요. 아가씨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절대 아니죠.”
폴리애나가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날 좋아하는걸요. 하지만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에요. 오늘에서야 말해준 건데 한때는 나를 다신 보고 싶지 않았대요. 날 보면 그분이 잊고 싶어 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하셨죠. 하지만 결국에는….”
“뭐라고요?” 낸시가 흥분해서 끼어들었다. “아가씨를 보면 잊어버리고 싶은 무언가가 생각난다고 했다고요?”
“그래요. 하지만 결국….”
“그게 뭔데요?” 낸시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건 말하지 않았어요. 잊으려고 하는 일이라고만 했어요.”
“비밀이구나!” 낸시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진 거예요. 오, 아가씨! 소설에서처럼 말이에요. 그런 게 많이 있었어요. ‘모드 아가씨의 비밀’이라든지 ‘사라진 상속인’이라든지 ‘비밀스러운 세월’이라든지. 모두가 비밀이 있는 이야기예요. 세상에나! 이렇게 바로 코앞에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자, 전부 말해 봐요. 그가 아가씨를 좋아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당연한 일이에요!”
“하지만 나랑 처음 말할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내가 송아지족 젤리를 가져가서 폴리 이모가 보낸 게 아니라고 알려 주기 전까지는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니까요. 그리고….”
낸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을 움켜잡았다.
“어머, 아가씨. 알았어요, 알았어. 제가 알아냈어요!”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더니, 다음 순간 폴리애나의 곁에 바싹 다가와 앉았다. “얘기해 보세요. 잘 생각해 보고 제대로 대답해야 해요.” 낸시는 무척 흥분한 듯 보였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폴리의 조카라는 걸 안 다음부터 아가씨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는 거죠? 맞아요?”
“맞아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내가 그 얘기를 했거든요. 그리고 오늘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낸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리고 폴리 마님은 젤리를 보내려 하지 않았고요. 맞죠?”
“맞아요.”
“그리고 아가씨는 이모가 보낸 게 아니라고 펜들턴 씨에게 말했고요.”
“음. 그래요.”
“그리고 아가씨가 마님의 조카라는 걸 알고 나자 펜들턴 씨가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행동했고요?”
“맞아요. 조금 이상했어요. 젤리에 대해서 말이에요.” 폴리애나가 생각에 잠기며 낸시의 말에 동의했다.
낸시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알았어요. 확실해요! 들어 보세요. 존 펜들턴 씨는 폴리 해링턴의 연인이었어요! 낸시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주어 말하면서도 흘끔흘끔 주위를 살폈다.
“어머나, 낸시, 그럴 리가요! 이모는 아저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폴리애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낸시가 비웃듯 폴리애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당연히 좋아하지 않죠! 그게 싸움이라는 거니까요!”
폴리애나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낸시는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아가씨가 오기 바로 전에, 톰 할아버지가 폴리 마님에게 한때 연인이 있었다고 말해 줬거든요. 저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마님과 연인이라니! 하지만 톰 할아버지는 그 말이 사실이고 상대는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어요. 이제 보니 그 사람이 바로 존 펜들턴이었어요. 그 사람이야말로 비밀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게 큰 저택에 혼자 살면서 아무 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요. 아가씨가 폴리 마님의 조카라는 걸 알았을 때 그가 이상하게 행동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아가씨가 자신이 잊고자 하는 걸 떠오르게 한다고 인정했다면서요. 그게 폴리 마님이 아니고 누구겠어요! 마님도 젤리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요. 이건 아주 분명한 사실이라고요!”
“아아….” 폴리애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낸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다면 언젠가는 화해를 할 거예요. 둘 다 혼자이고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요. 서로 화해하게 되면 기쁠 거예요!”
낸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가씬 연인들에 대해 잘 모르는군요. 아직 어리니까요. 하지만 세상에서 아가씨의 ‘기쁨 놀이’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싸움을 한 연인들이에요. 펜들턴 씨와 마님도 그런 사이죠. 펜들턴 씨는 고집쟁이고 마님도….”
낸시는 자신이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기억하고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 갑자기 킥킥 웃기 시작했다.
“만약 아가씨가 두 분에게 그 놀이를 하게 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그분들도 기쁘게 화해를 할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놀라겠어요. 폴리 마님과 펜들턴 씨라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폴리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집으로 들어갈 때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