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무지개
8월의 무더운 날이 지나가면서 폴리애나는 꽤 자주 펜들턴 언덕의 큰 저택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리 좋지는 않았다. 펜들턴 씨는 그녀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사실 자주 그녀를 불렀다.) 폴리애나가 곁에 있다고 해서 더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적어도 폴리애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신기하고 예쁜 물건들, 책이며 사진이며 골동품 등을 많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해 들릴 정도로 속을 태우고 있었고, 달갑지 않은 집안 불청객들의 규칙과 통제에 대해 눈에 뜨일 정도로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는 폴리애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듯 보였고, 폴리애나도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가도 펜들턴은 창백하고 편치 않은 얼굴로 베개에 쓰러져 눕곤 했는데, 그것이 항상 폴리애나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떤 말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기쁨 놀이’에 대해서는 그에게도 놀이를 가르쳐 주려 했지만 적당한 때를 찾지 못했다. 두 번인가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겨우 아빠가 해준 말이 나올 만하면 존 펜들턴이 불쑥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려 버렸다.
폴리애나는 존 펜들턴이 폴리 이모의 옛 연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좋아하는 만큼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 끔찍이도 외로운 삶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펜들턴에게 이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는 때로는 귀담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짜증을 냈으며, 꽉 다문 입술에 재미있는 듯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모에게도 펜들턴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이야기해 보려 노력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폴리는 길게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고, 항상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다. 예를 들면 칠턴 선생의 경우도 그랬다. 폴리애나는 베란다에서 이모가 머리에 장미를 꽂고 레이스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모습을 그가 보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폴리가 칠턴에게 특히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폴리애나가 심한 감기에 걸려 누워만 있을 때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밤까지 좋아지지 않으면 의사 선생님을 불러야겠다.” 폴리가 말했다.
“그렇담 전 계속 아플래요.” 폴리애나가 기분 좋게 말했다. “칠턴 선생님이 절 보러 오시면 좋겠어요!”
그때 이모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칠턴 선생은 부르지 않을 거야, 폴리애나.” 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 주치의가 아니란다. 워런 선생을 부를 거야. 네 상태가 더 나빠진다면 말이야.”
하지만 폴리애나는 더 나빠지지 않았고 워런 선생님도 오지 않았다.
“어쨌든 전 기뻐요.” 그날 저녁 폴리애나가 폴리에게 말했다. “물론 전 워런 선생님도 좋지만 칠턴 선생님이 더 좋아요. 그분을 부르지 않으면 아마 섭섭해하실 거예요. 그날 제가 이모를 이렇게 예쁘게 꾸며 드린 걸 칠턴 선생님이 봤다고 해도 그건 정말이지 그분 잘못이 아니에요.” 폴리애나가 아쉬워했다.
“그만 됐다, 폴리애나. 칠턴 선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구나. 그 사람 기분도.” 폴리가 나무라듯 단호하게 말했다.
폴리애나는 슬픈 듯하면서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잠시 이모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모의 뺨이 그렇게 장밋빛으로 물드는 걸 보고 싶어요. 이모의 머리를 빗겨 드리고 싶어요. 어, 폴리 이모!” 하지만 폴리는 벌써 방을 나가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8월도 끝나갈 무렵, 폴리애나는 아침 일찍 존 펜들턴을 찾아갔다가 그의 베개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무지갯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감탄과 놀라움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와, 펜들턴 아저씨, 아기 무지개예요. 진짜 무지개가 아저씨에게 문병을 왔어요!” 폴리애나가 손뼉을 치며 외쳤다. “와, 정말 예뻐요! 하지만 어떻게 들어왔지?”
펜들턴은 피식 웃었다. 오늘 아침엔 특히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글쎄, 내가 보기엔 창문의 유리 온도계 모서리로 ‘들어온’ 것 같구나.” 그가 지친 듯 말했다. “햇빛이 닿으면 안 되는데 아침엔 어쩔 수 없구나.”
“아, 하지만 정말 예뻐요, 펜들턴 아저씨! 햇빛만으로 이렇게 되나요? 세상에! 저라면 하루 종일 온도계를 햇볕에 두겠어요!”
“그렇다면 온도계가 전혀 쓸모가 없지.” 펜들턴이 웃었다. “온도계를 하루 종일 햇볕에 걸어 두면 얼마나 더운지, 얼마나 추운지 어떻게 알겠니?”
“상관없어요.” 폴리애나가 베개 위에서 빛나고 있는 무지개에 시선을 빼앗긴 채 말했다. “항상 무지개 속에 살고 있다면 누가 그런 걸 신경 쓰겠어요!”
펜들턴이 다시 웃었다. 그는 폴리애나의 넋 나간 얼굴을 조금 호기심 어리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종을 눌렀다.
나이 든 가정부가 문에 나타나자 그가 말했다. “노라, 앞 객실에 있는 벽난로 장식 중에서 놋쇠 촛대를 하나만 가져와.”
가정부는 조금 의아해하는 듯하더니 금세 촛대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가 침대 곁으로 걸어가자 고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손에 든 고풍스러운 촛대 주위에 달린 프리즘 장식에서 나는 소리였다.
“고마워. 그걸 여기 스탠드 위에 놓아줘.” 그가 지시했다. “이제 끈을 가져와서 저기 창문에 있는 커튼 쇠붙이에 잡아매. 커튼을 걷고 줄이 끝에서 끝까지 닿도록 해줘. 됐어. 고마워.”
가정부가 일을 끝내고 방을 나가자 펜들턴은 이상한 듯 쳐다보고 있는 폴리애나에게 미소 띤 얼굴을 돌렸다.
“폴리애나, 내게 촛대를 가져오렴.”
폴리애나는 두 손으로 촛대를 들고 갔다. 펜들턴은 12개 정도 되는 촛대의 장식을 하나하나 떼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이것들을 노라가 창문에 묶어 놓은 줄에다 걸어 보렴. 네가 정말로 무지개 속에 살고 싶다면 무지개를 만들어 줘야지.”
햇빛이 드는 창문에 장식을 세 개 달자 폴리애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손이 떨려 남은 장식을 걸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마지막 장식까지 걸고 나자 그녀는 낮게 비명을 지르며 기뻐했다.
호화롭지만 음침했던 방이 요정의 나라가 되었다. 모든 곳이 빨강, 초록, 보라, 오렌지, 금빛과 물빛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벽과 바닥, 가구, 침대까지도 일렁이는 색으로 환하게 빛났다.
“와, 와, 와, 정말 아름다워요!” 폴리애나가 숨을 헐떡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태양도 그 놀이를 하려는 거예요, 그렇죠?” 그녀는 펜들턴이 아직 그 놀이에 대해 모른다는 것도 잊고 떠들어 댔다. “저에게 이런 것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폴리 이모와 스노우 아주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고 싶어요. 그럼 모두들 기뻐할 거예요! 이런 무지개 속에 살게 된다면 아무리 이모라도 너무 기뻐서 문을 쾅 닫을 수밖에 없을걸요. 그렇지 않아요?”
펜들턴이 웃었다.
“글쎄, 내 기억으로는 네 이모가 기뻐서 문을 쾅쾅 닫으려면 이런 프리즘 가지고는 안 될 거다. 그건 그렇고, 아까 한 말은 뭐니?”
폴리애나가 가만히 쳐다보다가 생각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깜박했어요. 아저씨는 그 놀이를 모르시죠. 이제야 기억이 났어요.”
“그럼 얘기해 보렴.”
그제야 폴리애나는 기쁨 놀이를 아저씨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인형 대신 받은 지팡이 얘기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말하는 동안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의 황홀한 시선은 여전히 햇빛이 드는 창가에 걸려 있는 프리즘 장식과 거기서 나오는 아름다운 빛에 가 있었다.
“그게 다예요. 이제 제가 왜 태양이 그 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는지 아시겠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펜들턴이 불안정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일 훌륭한 프리즘은 바로 폴리애나, 너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하지만 전 아무리 햇살을 받아도 저렇게 예쁜 빨강, 초록, 보라색을 낼 수 없는걸요!”
“그럴까?” 펜들턴이 웃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폴리애나는 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인지 의아했다.
“그럼요.” 잠시 후 폴리애나가 슬픈 듯 덧붙였다. “주근깨만 더 생길 뿐이죠. 햇빛이 주근깨를 만든다고 이모가 그러셨어요!”
펜들턴이 조금 웃자 폴리애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웃음소리는 거의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