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북스 전자책 폴리애나 1] 23장. 사 고

in pollyanna •  7 years ago 

23장. 사 고


어느 날, 폴리애나는 스노우 부인이 잊어버린 약 이름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칠턴 선생님을 찾아갔다. 폴리애나가 칠턴의 진료소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긴 처음 와 봐요! 여기가 선생님 댁인가요?” 폴리애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칠턴이 조금 슬프게 웃었다. 


“뭐, 그런 셈이지.” 그가 뭔가를 종이에 쓰며 대답했다. “하지만 가정이라 하기엔 꽤나 형편없지. 그냥 방이 몇 개 있을 뿐이지. 그게 전부야. 가정은 아니란다.” 


폴리애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해한다는 듯 동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알아요. 여자의 손길과 마음, 또는 아이들이 있어야 가정이 완성되죠.” 


“뭐라고?” 칠턴이 홱 돌아섰다. 


“펜들턴 아저씨가 말해 줬어요.” 폴리애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손길과 마음, 아이들에 대해서요. 여자의 손길과 마음을 얻는 게 어떠세요? 아니면 지미 빈을 맡으실 수도 있을 텐데. 펜들턴 아저씨가 그 애를 맡지 않겠다고 하시면요.” 


칠턴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펜들턴 씨가 가정이란 여자의 손길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그가 폴리애나의 말에 회피하듯 물었다.


“네. 아저씨도 집에서 그냥 사는 거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어떠세요?” 


“어떠냐니… 뭘 말이냐?” 칠턴이 책상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여자의 손길과 마음을 얻는 거요. 아, 제가 깜박했어요.” 폴리애나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펜들턴 아저씨가 오래 전 사랑했던 사람은 폴리 이모가 아니래요. 그래서 우린 그곳에서 살지 않기로 했어요. 전 그런 줄 알고 선생님께 말씀드린 건데 제 실수였죠. 선생님이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길 바라요.” 폴리애나가 걱정스럽게 말을 마쳤다. 


“그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단다, 폴리애나.” 칠턴이 조금 이상하게 대답했다. 


“아, 그럼 됐어요.” 폴리애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께만 말한 거였거든요. 제가 선생님께 말했다고 하니까 펜들턴 아저씨의 표정이 약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랬니?” 칠턴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네. 물론 아저씨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원치 않으셨을 거예요. 사실이 아니었으니까요. 어쨌든 여자의 손길과 마음을 얻는 게 어떠세요, 선생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의사가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건 항상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꼬마 아가씨야.” 


폴리애나가 생각에 잠겨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선생님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폴리애나가 주장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고맙구나.” 칠턴이 눈썹을 올리며 웃다가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여자들은 날 그다지 믿는 것 같지 않아 걱정이구나. 아무튼 모두 그렇게 친절한 편은 아니란다.” 


폴리애나가 다시 인상을 썼다. 놀라서 눈은 동그래졌다. 


“선생님, 선생님도 누군가의 손길과 마음을 가지려고 했었군요? 펜들턴 아저씨처럼요. 그런데 얻지 못하신 거예요?” 


칠턴이 벌떡 일어났다. 


“자, 자, 폴리애나, 신경 쓸 것 없다. 다른 사람의 일로 골머리를 썩이지 말거라. 지금 스노우 부인 댁으로 가렴. 약 이름과 복용법을 적었으니까. 또 다른 볼일이 있니?” 


폴리애나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선생님, 감사드려요.” 폴리애나가 문 쪽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복도를 조금 지나가다 환한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어쨌든 선생님이 원했지만 갖지 못한 것이 우리 엄마의 손길과 마음이 아니라서 기뻐요. 안녕히 계세요!” 


사고가 일어난 것은 10월 마지막 날이었다. 학교에서 급하게 집으로 오던 폴리애나가 길을 건너다가 빠르게 달려오던 자동차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후 5시, 의식을 잃은 채 축 처진 폴리애나가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폴리와 울음을 터트린 낸시가 조심스럽게 폴리애나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곧이어 전화 연락을 받은 워런 의사가 급히 달려왔다. 


“마님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의사가 도착해 방문을 닫아 버리자 낸시는 울먹이며 정원에 있는 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마님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그건 전혀 의무감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게 손을 떨고 저승사자와 싸우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건 단지 의무감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죠. 톰 할아버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아요!” 


“많이 다쳤니?” 톰 할아버지가 몸을 떨었다. 


“아직 몰라요.” 낸시가 또다시 흐느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누워만 있는걸요. 하지만 마님이 죽은 건 아니랬어요. 계속 맥을 짚고 숨소리를 듣고 있었으니 마님의 말이 맞을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뭐라고 얘기해 줄 수 없을까? 도대체….” 톰 할아버지의 얼굴에 경련이 이는 듯했다. 


낸시가 조금 진정하고 말했다. 


“커다랗고 힘센 것이었어요. 젠장! 그 무지막지한 것이 어린 아가씨를 쳤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 항상 그 악마 같은 냄새가 나는 자동차를 싫어했어요. 정말 싫었어요!” 


“그래서 어딜 다친 거니?”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낸시가 신음했다. “그 사랑스러운 머리가 약간 찢어졌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마님이 말씀하셨어요. 속이 다친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하셨죠. 전 의사 선생님이 나오실 때까지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것 같아요. 빨랫거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아주 많이요.” 낸시가 손을 꽉 움켜쥐며 흐느꼈다. 


하지만 의사가 돌아간 후에도 낸시가 톰 할아버지에게 전할 말은 거의 없었다. 부러진 뼈도 없었고 긁힌 상처는 경미했다. 하지만 워런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돌아간 후, 폴리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창백해지고 핼쑥해 보였다. 폴리애나는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주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험 많은 간호사도 그날 밤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낸시는 흐느끼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폴리애나가 의식을 찾아 눈을 뜨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어, 이모, 무슨 일이에요? 대낮이에요? 왜 깨우지 않으셨어요?” 폴리애나가 외쳤다. “어, 이모. 일어날 수가 없어요.” 폴리애나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신음하며 베개 위로 쓰러졌다. 


“안 된다, 얘야. 아직은 일어나지 말거라.” 폴리가 급하게, 하지만 아주 조용하게 타일렀다. 


“무슨 일이에요? 왜 제가 못 일어나는 거죠?” 


폴리애나가 보지 않는 곳에서 폴리는 창가에 서 있는 흰 모자를 쓴 간호사에게 눈빛으로 고뇌에 찬 질문을 던졌다. 


젊은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폴리는 헛기침을 하고 거의 말을 할 수 없게 목이 메는 것을 삼키려 노력했다. 


“넌 다쳤단다, 얘야. 지난밤에 교통사고가 있었어. 하지만 이제 괜찮아. 푹 쉬면서 잠을 더 자면 좋겠구나.” 


“다쳤다고요? 아, 제가 달려갔어요.” 폴리애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이마에 가져갔다. “어, 붕대가 감겨 있네요. 그리고… 아파요!” 


“그래. 하지만 신경 쓰지 마라. 그냥… 좀 쉬렴.” 


“하지만 이모, 정말 재밌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해요. 다리에 느낌이… 아주 이상해요… 아무 느낌이 없어요!” 


간호사의 얼굴을 호소하듯 바라보던 폴리는 쓰러질 듯 일어나 방을 나갔다. 간호사가 잽싸게 앞으로 다가왔다. 


“이젠 나와 이야기하자꾸나.” 간호사가 명랑하게 말을 시작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내 소개를 할게. 난 헌트라고 해. 이모가 널 돌봐 주는 일을 도와주러 왔단다. 그리고 내가 처음 할 일은 이 작고 하얀 약을 네게 먹이는 거야.” 


폴리애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전 돌봐줄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오래는요! 전 일어나고 싶어요. 학교에 가야 하거든요. 내일은 학교에 갈 수 있을까요?” 


창가에 서 있는 폴리에게서 반쯤 억누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간호사가 밝게 웃었다. 


“글쎄, 그렇게 빨리는 나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우선 이 약을 먹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보자꾸나.” 


“알겠어요.” 폴리애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모레는 꼭 학교에 가야 해요. 시험이 있거든요.” 


잠시 후 폴리애나가 입을 열었다. 학교와 자동차, 그리고 머리가 어떻게 아픈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약기운 때문인지 곧 목소리가 잠잠해지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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