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북스 전자책 폴리애나 1] 24장. 존 펜들턴

in pollyanna •  7 years ago 

24장. 존 펜들턴 


폴리애나는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잠깐 의식이 온전히 돌아와 자꾸만 캐묻는 때를 빼면 폴리애나는 이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다. 사실 폴리애나는 한 주가 지날 때까지 의식이 또렷하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열이 내리고 통증이 조금 덜해졌으며 의식을 완전히 되찾았다. 이후 폴리애나는 사건의 경위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래서 전 다친 거군요. 아픈 게 아니고요.” 마침내 폴리애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기뻐요.” 


“기쁘다고?” 침대 곁에 앉아 있던 폴리가 물었다.


“네. 스노우 아주머니처럼 평생 누워 있어야 하는 것보다 펜들턴 아저씨처럼 다리가 부러진 게 훨씬 낫잖아요. 부러진 다리는 괜찮아지지만, 평생 누워 있어야 하는 건 그렇지 않아요.” 


폴리는 부러진 다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갑자기 일어나 방 저쪽의 작은 화장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것저것 물건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평소의 단호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핼쑥했다.


폴리애나는 침대에 누워 창가의 프리즘 하나가 천장에 비추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게 천연두가 아닌 것도 기뻐요.” 폴리애나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건 주근깨보다 더 끔찍했을 거예요. 백일해가 아닌 것도 기뻐요. 한 번 앓았었는데 정말 괴로워요. 맹장염이나 홍역이 아닌 것도 기뻐요. 그건 전염되잖아요. 아마 여기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넌 참 여러 가지로 기뻐하는 것 같구나.” 폴리가 목에 손을 갖다 대며 더듬거렸다. 


폴리애나가 가볍게 웃었다.


“맞아요. 저 무지개를 올려다보면서 내내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전 무지개가 정말 좋아요. 펜들턴 아저씨가 프리즘을 주셔서 정말 기뻐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다른 기쁜 일들도 있어요. 하지만 가장 기쁜 건 제가 다친 거예요.” 


“폴리애나!” 


폴리애나가 다시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이모를 바라보았다. “제가 다친 후로 이모는 제게 ‘착하다’고 자주 말해 줬거든요. 전엔 그러지 않으셨는데. 전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게 진짜 좋아요. 부인회에서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는데, 물론 꽤 기분이 좋았지만 이모가 말해 주는 것만큼 신나지는 않았어요. 아, 이모가 제 친척이라서 아주 기뻐요!”


폴리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다시 목으로 가져갔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서둘러 방을 나가 버렸다. 마침 간호사가 들어왔다. 


낸시가 마구간에서 마구를 청소하던 톰 할아버지에게 달려간 것은 그날 오후였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맞혀 보세요.” 낸시가 숨을 헐떡였다. “아마 천년이 지나도 모르실걸요. 분명해요!” 


“그렇다면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구나. 난 앞으로 10년도 채 살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얼른 말해 보렴.” 


“들어 보세요. 지금 마님이 객실에서 누구와 함께 있는지 아세요?” 


톰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알겠니.” 


“네, 그렇죠. 제가 말씀드릴게요. 존 펜들턴 씨예요.”


“세상에! 농담이겠지?” 


“아니에요. 제가 직접 그분을 안내한걸요! 그분이 타고 온 마차가 지금도 문 앞에 대기하고 있어요. 그렇게 까다로운 노인네에다 아무하고도 절대 말을 하지 않는 분이. 생각을 해 보세요. 그분이 마님을 찾아오다니!” 


“그게 어쨌다는 거냐?” 톰 할아버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


낸시는 책망하는 눈빛으로 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보다 잘 모르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뭐라고?” 


“모르는 척할 필요 없어요.” 낸시가 분개하며 말했다. “처음에 제게 쓸데없는 추리를 하게 한 건 할아버지였잖아요!” 


“무슨 말이냐?” 


낸시가 열려 있는 마구간 문을 통해 집 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할아버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들어 보세요! 처음에 마님에게 연인이 있었다고 말씀해 주신 건 할아버지 아니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2와 2를 찾아내고 그걸 합쳐 4를 만들었죠. 하지만 그게 5가 되어 버렸어요. 4는 절대 될 수 없죠. 천만에요!”


톰 할아버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나한테 이야기를 하려면 상식적으로 분명하게 말하거라. 난 셈 같은 것에는 관심 없으니까.” 


낸시가 웃었다. 


“그럼 이런 거죠. 전 존 펜들턴이 마님의 연인이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만한 이야기를 들었었거든요.” 


“펜들턴이라고!” 톰 할아버지가 허리를 폈다.


“네. 지금은 그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죠. 그가 사랑한 사람은 저 축복받은 아가씨의 어머니였죠. 그래서 그분이 원했던 거예요. 아,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세요.” 낸시는 폴리애나와의 약속이 문득 떠올라 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펜들턴이 폴리애나에게 함께 살자고 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마님과 그 분은 몇 년 동안 말 한마디도 해보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마님이 18살인가 20살 때에 두 사람에 대한 뜬소문이 돌아서 마님은 그분을 무척 싫어한다는 것도 알아냈죠.” 


“그래, 기억나는구나. 제니 아가씨가 펜들턴 씨를 마다하고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 버리고 난 후 3~4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지. 물론 마님도 그 사실을 아시고 그를 가엾게 여기셨어. 그래서 잘 대해 주려고 했던 건데, 아마도 그게 조금 과했던 모양이야. 마님은 언니를 데려간 그 목사를 싫어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누군가 마님이 그를 쫓아다닌다는 소문을 퍼뜨렸어.” 


“남자를 쫓아다닌다고요? 마님이!” 낸시가 참견을 했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지. 곧은 성품을 가진 아가씨라면 참을 수 없는 일이지. 그때쯤 마님은 연인과 문제가 생겼고, 그 후부터 입을 꼭 다물고는 아무도 상대하려 하지 않았어. 마음을 크게 다치신 모양이야.” 


“네, 알아요.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을 현관에서 보고 기절할 뻔한 거죠. 마님과 이미 몇 년 동안 말 한마디 안 하던 분이 찾아오다니! 어쨌든 그분을 안내하고 마님께 말씀드리러 갔죠.” 


“마님은 뭐라고 하시던?” 톰 할아버지가 숨을 멈추고 물었다. 


“처음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저 가만히 계시기에 전 못 들으신 줄 알았어요. 다시 말씀드리려 하는데 ‘곧 내려간다고 전해라’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펜들턴 씨에게 그 말을 전하고 할아버지에게 온 거예요.” 낸시는 말을 마치며 다시 집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흠!” 톰 할아버지가 신음소리를 내더니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해링턴가의 격식을 차린 객실에서 존 펜들턴이 기다린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폴리의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일어서려고 하자 폴리가 손짓으로 저지했다. 하지만 악수를 청하지는 않았으며 얼굴은 냉담했다. 


“폴리애나의 상태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펜들턴이 약간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똑같은 상태입니다.” 폴리가 말했다. 


“상태가 어떤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폴리의 얼굴에 빠르게 경련이 일어났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르신다는 말씀인가요?”


“네.” 


“하지만… 의사는 뭐라고 합니까?” 


“워런 선생도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뉴욕에 있는 전문의에게 편지를 보내 당장 왕진 일정을 잡으려고 합니다.” 


“어디를 얼마나 다친 것인지….” 


“머리에 가벼운 상처가 있고 한두 군데 멍이 들었고… 척추를 다쳐 허리 아래가 마비된 것 같아요.” 


펜들턴에게서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폴리애나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직 전혀 모르고 있어요.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애도 알아야 합니다!” 


폴리가 손을 목 칼라에 가져갔다. 최근 버릇처럼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예, 그렇죠. 그 애도 자신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스노우 부인처럼 평생 불구로 사는 것보다 당신처럼 다리가 부러져서 기쁘다고 말하고 있지요. 부러진 다리는 나아지겠지만 불구는 그렇지 못하다면서. 항상 그렇게 말을 하니… 제가 죽을 지경이에요!” 


펜들턴이 눈물을 글썽이며 상대의 감정에 북받친 핼쑥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과 함께 살자고 마지막으로 청했을 때 폴리애나가 “전 이모를 떠날 수 없어요!”라고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폴리애나에게 저와 함께 살자고 얼마나 열심히 부탁했는지 모릅니다.” 


“폴리애나에게 당신과 함께 살자고요?”


펜들턴이 약간 움찔했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법적으로 폴리애나를 양녀로 삼고 싶었지요. 물론 제 상속인으로요.”


마주 앉아 있던 폴리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의 양녀가 되면 폴리애나에게 얼마나 밝은 미래가 펼쳐질지 문득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폴리는 폴리애나가 이 남자의 돈과 지위에 끌릴 만큼 세상물정을 잘 알고 있을지 의아했다. 


“저는 폴리애나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그 애도 그렇고 그 애 엄마도 그렇고… 전 25년 동안 모아온 사랑을 폴리애나에게 모두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이라.” 폴리는 처음에 자신이 이 아이를 맡게 된 이유가 갑자기 생각났다. 바로 오늘 아침 폴리애나가 했던 말도 함께 말이다. ‘저는 이모가 제게 착하다고 말해 주는 게 너무 좋아요!’ 이 사랑에 굶주린 어린 소녀에게 25년간 모아둔 애정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폴리애나는 사랑에 끌릴 만큼 나이가 들었다! 폴리는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이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여전히 철렁한 가슴으로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이제 폴리애나 없이는 자신의 미래도 쓸쓸할 뿐이라는 쓰라린 사실 말이다. 


“그래서요?” 폴리가 물었다. 펜들턴은 자제하려 해도 그녀의 엄격한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슬프게 미소 지었다. 


“폴리애나는 오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어째서요?” 


“당신을 떠날 수 없다고요. 당신이 너무 잘해 준다고 하더군요.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도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할 거라고요.” 그는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는 폴리 쪽은 보지 않고 문 쪽으로 단호히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순간 그는 가벼운 발소리가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고, 떨리는 손이 그에게 내밀어지는 것을 보았다. 


“전문의가 와서 폴리애나의 상태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폴리애나가 기뻐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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