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원문 출처 : http://buddhastudy.egloos.com/4138010
今日の初日のテーマはこのようになります。
仏教とは何か?
これが初日のテーマなのです。
仏教とは何か?
文字通りに解釈するとどうなりますか?
仏教だからブッダの教えです。
(ブッダの仏、おしえるの教) ブッダの教。
ところが、仏、解釈というのは何か?
ブッダは文字通りに解釈すると悟った方です。
そして悟った方の教えです。
'ブッダの教え'すると範囲が少し狭く見えたが、'悟った方の教え'とするとちょっと広く見えるんじゃないですか。
悟った方の教えだ。
그럼 깨달은이가 뭐 하러 가르침을 폈겠어요?
깨달았으면 되었지. 안 그래요? 깨달았으면 되었지 뭐하러 가르치느냐?
그러니 깨달은 이의 가르침은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깨달은이의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불교는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은이의 가르침’ 하니까, 목적이 꼭 부처나 깨달은 사람한테 있는 것 같다가,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이다 하니까 목적이 어디 왔습니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왔어요.
그러면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이니까, 깨닫지 못한 자가 그 가르침을 들으면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깨달아져야 되죠.
그런데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못했다면 그 목적이 달성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안 되었어.
그러니까 깨닫지 못한 자는 불자가 아니오.
그러니까 불교의 일은 뭐냐?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듣고 뭔가 깨달은 사람이 뭐다? 불자요.
뭔가 깨달았어요? 으흠.
깨닫지 못했으면 불자가 아니에요. 절에 30년 다녀도, 승려생활을 50년 했거나.
그렇다 해도 뭔가 깨닫지 못했다면 불자도 아니고, 불교인이 아니고, 절에 한 번도 안 나와도 다른 종교에 목매달고 다녀도, “뭔가 인생에 깨달은 바가 있다.” 이러면 불교인이오.
원래 정의가 그래요.
그러니 우리의 관심은 “깨달은 이가 누구냐?”
“깨달으려고 하는 이가 누구냐?” 이게 관심이지.
이 사람이 “교회 다니냐? 절에 다니냐? 어느 종파에 다니냐?” 이것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 사람이 여기 앉아 있는데, 지금 검은 옷 입은 사람도 있고, 빨간 옷 입은 사람도 있고, 노란 옷 입은 사람도 있죠. 옷은 별 상관이 없죠. 옷이라는 것은 갈아입으면 됩니까? 갈아입으면 안 됩니까? 갈아입으면 되잖아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러니 뭔가 깨달아야 되요. 그런데 당연히 질문이 뭐겠어요? 뭐 깨닫는다는 거요? 뭐? 깨닫는다. 깨닫는다 하는데 뭐 깨닫는다는 거요? 이렇게 질문이 당연히 될 수밖에 없죠. 무엇을 깨닫는다는 얘기냐? 어떻게 깨닫는다는 얘기냐? 깨달은 상태라는 게 어떤 상태냐? 깨달아 뭐하느냐? 그죠? 깨달아 뭐 하노? 이 말이야. 그것은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냐? 이 말이죠. 깨달으면 뭐하느냐? 이 말이오. 이 4가지 질문은 필연적이오.
뭘 깨닫노?
어떻게 깨닫노?
깨달음이 도대체 어떤 상태고?
깨달으면 무슨 좋은 일이 있노?
당연한 질문이오. 어디 가서 이런 질문 해 봤어요? 왜 안 해봤어요. 맨날 “깨달아라.” “깨달아라.” 그러는데, 뭘 깨치는지 물어봐야 될 거 아니오. 좀 단답식으로 얘기를 하면요,
*뭘 깨닫노?
뭘 깨닫느냐?
실상을 깨닫는다.
이래요. 뭘 깨닫는다고요? 실상. 조금 더 확대해서 말하면 제법실상. 한자로 써야 유식한 것 같잖아. 그죠? 그런 거 다 버려버리면
존재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이게 제법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실상,
그대로 번역하면 뭐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오.
모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깨닫는 거요.
그 모습을 보는 거요.
그러면 “아 그거야 나도 본다. 나도 눈이 있어 보고, 귀 있어 듣고, 코 있어 냄새 맡고, 혀 있어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런 저런 생각해서 안다. 나도 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은 뭐냐? 이거야. 내가 아는 것은
실상반대가 뭐겠어요? 허상이오. 허상.
우리가 아는 것은 허상이래요.
화 안내요? 저런 미친놈이 있나? 우리가 아는 것은 허상이에요. 실상 맞는데. 허상이라니 한번 꼬집어 봐요. 아파요? 안 아파요? 아프지. 이거 진짜잖아. 아무튼 허상이라는 거요. 허상은 뭘 말하는 거냐? 자, 꿈은 허상이오? 실상이오? 허상이죠. 여러분이 마리화나 피워서 환각작용 일으킨적 있어요? 그것도 안 해봤어요?
자, 그런 어떤 환상을 보는 사람들도 있죠. 길가다가 갑자기 귀신을 봤다든지, 이런 환상을 보는 사람이 있잖아. 환각작용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죠. 몽유병 환자 같은 사람도 있죠. 환상이란 말이오. 이 꿈이라든지, 환상 같은 것을, 실제로 있었느냐? 그 사람이 착각했느냐? 어느 쪽이에요? 그 사람이 착각한 거요. 그 사람에게는 분명히 보였어요? 안 보였어요? 보였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그 사람이 무엇인가 착각을 한 거요. 이런 것을 환상이라고 그래요. 그럼 여러분들은 지금 환상을 본 것은 아니죠. 분명히 실상을 보잖아. 그죠? 다 깨달았네. 하하하.
어떻게 깨닫노?
자, 그다음 두 번째 그럼 어떻게 실상을 보느냐? 즉, 어떻게 깨닫느냐? 이 말이죠. 좀 유식한 말로하면 남방불교식으로 말하면 /정견/바르게 본다. 바르게 봐야 해. 못 깨달은 사람은 반대말이 뭐겠어요? /사견/삿되게 본다. 틀리게 본다. 또 반야심경의 용어를 빌리면 /조견/비추어 본다. 이래요.
깜깜한 밤에 아무것도 안 보요. 동서남북 구분 못해 손을 더듬더듬하는 것이 깨닫지 못한 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고, 그러다가 프레쉬를 비추니까 한눈에 탁! 보여요. 바깥에서 불을 탁! 켜버리니까 이 방이 싹~ 한눈에 들어와요. 이런 것을 조견, 비추어 본다. 그러니까 그 말은 있는 그대로 본다.
실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죠.
그것을 내가 있는 그대로 보는 거요.
있는 그대로 나도 보고 있는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냐? 그런데 정말 보고 있는지는 조금씩 공부를 해가다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아, 스님 얘기를 들어보니까, 나는 못 깨달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난 깨달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자신을 가지셔도 되요. “나는 교회에 다녀서 불교를 거부했더니, 알고 봤더니 내가 바로 불자구나.” 그렇게 딱 자신감을 가지셔도 되고, 또 공부를 하다 보니 “야, 이거 완전히 꿈속에서 헤매었구나. 하나도 제대로 본 게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면 “아, 그럼 깨달아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시면 되요.
깨달음이 도대체 어떤 상태고?
그러면 깨달은 사람 상태는 어떤 상태냐? 훤하게 보는 상태가 깨달은 상태에요. 여러분이 불 켜놓고 훤하게 보는 상태 있죠? 이렇게 보는 게 깨달은 상태고, 깨닫지 못한 상태는 불을 한번 꺼볼까요? 불 꺼서 깜깜해서 옆에 누가 있는지도 안 보이는 거요.
그래서 옛 보살들 얘기를 들어보면, 깨닫지 못했을 때는 아무도 안보이고 자기밖에, 이 세상에 자기 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딱 깨닫고 보니까 자기 주위에 수백, 수천, 수만, 수백만, 수천만, 수억, 수조, 수경의 생명이 자기 주위에 있는 것을 보게 된 거요.
깨닫기 전에는 이 지구만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더니, 깨닫고 나니까 엄청난 다른 세계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계가 이 우주 공간에 있단 말이오. 안 보이던 게 한눈에 확 보인다. 모르던 게 알아집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는
깜깜한 상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깨닫고 났을 때는
환한 상태, 훤히 다 아는 상태.
깨닫지 못했을 때는
알기는 알아도 긴가민가했던 상태인데,
깨닫고 나면
아주 그냥 분명하게 훤하게 보이니까
애매모호한 게 없어지고 분명해 진다.
그러니까 믿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믿으려고 애쓴다는 말은 믿기지가 않으니까 애를 써야 되잖아. 그냥 훤하니까 애쓸 것도 아무것도 없는 거요. 그래서 깨닫지 못한 것을 우리가 무명, 밝음이 없다. 무지_지혜가 없다. 이런 용어를 쓰죠.
- 깨달으면 무슨 좋은 일이 있노?
그럼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 있냐? 깨닫지 못했을 때는 헤매다가 밤에 동서남북을 구분 못해 헤매고 있는데, 불을 탁! 밝혀주면 길이 훤하게 보이죠. 헤맬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져요. 몰라서 답답했는데, 확 가라앉아 버리니까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져 버리는 거요.
내가 남의 발등을 꽉 밟고 있는데 밑을 안쳐다봐서 밟고 있는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자꾸 나를 때리는 거여. 그래서 억수로 억울했어요. “새끼, 이런 놈이 다 있나.” 한 두 번이지. 이렇게 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패버릴까?” 이러고 망설이고 있지마는 “그래도 내가 스님이니까 참아야지.” 이래서 억지로 참는 것을 수행으로 인내를 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래도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괴롭지.
그런데 발밑을 들여다보니까 내가 그 사람 발을 꽉 밟고 있는 거요. “어, 큰일 났구나.”하고 발을 뗐어. 그럴 때 마음속에 미움이나 원망이나 화가 남이 있어요? 안 남아 있어요? 안 남아 있죠. 싹~ 없어져버렸어. 그냥 그렇게 참고 인내를 해도 안 없어지던 괴로움이 “아이고, 내가 발 밟았네. 아이고, 미안합니다.” 이러고 나니 싹~ 없어져버렸어.
그러니까 그 결과가 어떠냐? 괴로움이 싹~ 없어져 버려요. 다 깨달으면 다 없어질 거고, 하나만 깨달으면 하나는 일단 확실히 없어지겠지. 이건 아주 분명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 아까 “야, 나도 깨달은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좀 했을 텐데, 이제 점검이 되겠죠. “아, 나 괴롭구나.” 이러면 “아, 이게 좀 멀었다.” 이런 얘기고, “나는 뭐 얘기 들어보니 아까는 못 깨달았는가 했는데, 이제 가만히 들어보니 난 아무 괴로움도 없어.” 이런면 좀 근접한 거요. 모르지 또 착각인지.
두 가지인데 하나 또 있어요. 여러분들 살면서 남의 눈치 봅니까? 안 봅니까? 보죠. 놀러가고 싶은데, 부모님 눈치 봐야 돼. 또 새로운 남자가 하나 나타났는데 기존의 남자 눈치 봐야 돼. 우리 살면서 늘 눈치를 보고, 거기 뭔가 속박이 되어 이렇게 산단 말이오. 그런데 이게 싹 풀어져버려요. 그래서 자유로워져 버려요. 속박에서 벗어나. 이것을 또 유식한 용어로 써야 될 거 아니오.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을 /열반/이라고 그래요.
니르바나. 인도말로 니르바나인데
한문으로 써서 우리식으로 읽어버리면 열반이오.
한자로는 해석이 안 돼요. 한자로 고치면 멸이오.
괴로움이 없어져버렸다. 멸.
그 다음에 모든 이런 속박이 사라져 버린 것을 /해탈/ 이래요.
그럼 깨달으면 이런 상태가 되는 거고,
깨달아 간다는 것은 이런 상태로 점점 나아가고 있는 거요.
그런데 여러분들 각자 자기 나이에서, 어릴 때하고 지금하고 비교해서, 골치 아픈 일이 많아졌어요? 적어졌어요? 눈치 볼 일이 많아졌어요? 적어졌어요. 그럼 거꾸로 살았어요. 해를 거듭할수록 그게 적어져야 돼.
전에는 남의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눈치 안 본다.
전에는 머리가 아프고 괴로운 일이 많았는데
요새는 별로 없어졌다.
이래야 그게 제대로 사는 거요.
그런데 어릴 때보다 지금 재산이 늘었어요? 안 늘었어요? 늘었죠. 지식도 늘었죠. 지위도 늘었죠. 먹는 것도 어릴 때보다 더 잘 먹나? 옷도 잘 입고? 그런데 왜 정작 고뇌는 더 많이 생기고, 눈치는 더 많이 보게 되느냐.
그것을 보면 이거 먹고 입고 자란 이런 일들이, 지금까지 내가 추구했던 이런 일들이 해탈과 열반, 즉, 행복과 자유의 길에 절대적인 요인이 아니다. 거기에 비례하는 게 아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비례한다면 다 좋아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안 좋아졌잖아요. 필요 없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거기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여러분들 스스로 알 수 있어요. 자, 그러니까 깨달아 볼만 해요? 안 해요? 볼만하죠.
꿈속에 살다가 정신 차리고 꿈에서 깬다. 괜찮은 얘기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깨달은 상태, 깨달음의 기쁨, 이런 것들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비유를 들어서 한번 얘기해 봅시다.
저기 벽보면 어떻게 보입니까. 색깔이? 빨개요? 자, 이 안경에다가 제가 멋을 낸다고 푸른 색깔을 집어넣었어요. 선글라스 그렇게 되죠. 그렇게 끼고 와서 저 벽을 보면 약간 좀 파랗게 보이겠죠. 그런데, 이 안경이 빨강색 넣은 사람도 있죠. 선글라스에. 약간 붉은 색깔을 넣은 사람은 안경을 끼고 벽을 보면 약간 붉게 보이겠죠.
그런데 두 사람이 여기 앉아서 벽을 쳐다보니까, 푸르게 보이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 법당이 수행하는 도량이니까 좀 시원하라고 푸른 색깔을 칠했구나.” 이런 생각할 것이고, 붉게 보이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법당은 안온하고 따뜻하라고 조금 붉은 색깔을 칠했구나. 둘이 같이 끄떡 끄덕해요.
그런데 파란 색깔의 안경을 낀 사람이 “법당 벽칠 잘했지?” 그러니까 붉은 색깔로 보이는 사람도 “음 잘했어.” 서로 통하죠. “아마 시원하라고 파란색을 칠했나봐.”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개인 생활에 비교를 하면
“벽 색깔 참 잘 칠했지.”
“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
요럴 때가 연애할 때요.
그런데 “시원하라고 푸른 색깔을 칠했네. 시원하라고 푸른 색깔 칠했나봐.” 이렇게 말하는 순간부터, “얘가 이게 무슨 소리하나.” 이렇게 되는 거죠.
“아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응, 파랗다고 그랬어.”
“그게 어떻게 파란색깔이야? 빨간색깔이지.”
이럴 때가 신혼초기에요.
그러다가
“야, 너 눈깔이 제대로 박혔어?
눈깔을 좀 똑똑히 뜨고 봐.
그게 어떻게 빨간 거야? 파란 거지. 정신 있어? 없어?”
이게 이제 초기를 넘기면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요.
살아보니까 사람이 전혀 틀려. 아니 그것도 비슷하게 파란 것을 푸르다고 그러면 이해가 되죠. 거기까지는 내가 이해를 해주겠다는 말이오. 그런데 붉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붉은 것을 노랗다고만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파랗다고 하니까 “이 사람 정말 제정신이가.” 이렇게 해서 싸운단 말이오.
그런데 남 같으면 금방 외면하면 되는데, 부부나 가까이 한 회사 살거나 하니까 고쳐줘야 되나? 안 고쳐줘야 되나? 고쳐줘야지. 싸우는 이유가 고쳐주려고 싸우는 건데, 가르쳐 주려고. 나름대로 깨우쳐 주려고 싸운단 말이오. 그래서 멱살잡이를 하고 싸워도 몇 번 두르려 패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잔소리를 하면 해결이 될 거 같았는데, 10년이 가도 안 고쳐져.
여러분들이 남편 술 먹는 거, 아내 무슨 버릇 고친다고 온갖 잔소리를 해도 안 고쳐지죠. 도무지 듣는 사람도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듣는 척이라도 하지.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니까. 그래서 속으로는 그러죠. “저게 어떻게 대학을 나왔을까? 대학을 나온 것들이 저따위 소리를 할까?” 이렇게 까지 가는 거요.
그러다가 그래봐야 집안만 시끄럽고 화만 나고 해결은 안 되고, 그러니까 아예 저것은 소귀에 경 읽기다. 해서 포기를 하죠. 외면하는 식이죠. 그래서 “여보, 파랗지?” “그래그래. 응응응.” 속으로는 “아이고 미친놈. 그래 너 혼자 실컷 파랗다고 해라.” 이래서 대강대강 친한 거요. 이렇게 우리의 관계가 유지되는 게 있어요.
그러나 이런 법문이나 듣고 “아하, 내가 같이 살면서 그래서는 안 되지. 뭔가 내가 좀 방식을 바꿔야 되겠다.” 이래서 집에 가서 “여보 여보” “왜?” “당신 벽색깔이 어때?” “그것을 뭘 물어? 알면서.” “아니 한번 얘기해 봐.” “말 안 해.” “파랗다고 그랬지.” “말이라고?” “당신 눈에 파랗게 보이나?” “그럼.” “아하. 그럴 법도 한데, 그지.” “아, 이제 정신 차렸구나.”
“당신 파랗다고 그럴 때 내가 반대 많이 했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여보,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 차려서 봐봐.” 이게 뭐요? 대화. 대화를 하자 이거야. 우리 싸우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서로 대화를 하자 이거야. 그래서 수도 없이 대화해도 “당신 자세히 봐라. 혹시 붉은 색깔로는 보인 적이 없나?” 이렇게 딱 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게 또?” 판이 딱 깨져버려.
그러니까 대화하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어려요. “제가 스님 법문 듣고 참회도 하고 뉘우치고요, 제가 잘못했다 생각을 하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한테 얘기를 하는데, 이 사람은 도저히 구제불능입니다. 안 됩니다.” 이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3가지 유형이오.
싸우는 유형,
외면하는 유형,
그래도 대화해 보려고 애쓰는 유형.
그래도 이게 우리 안경 낀 사람수준에서는 최선의 방법이오.
그런데 깨달은 사람에서 보면 오십보백보요. 그 나물에 그 밥이오. 안경을 탁 벗으면 얘기할 필요가 없어. 안경을 벗는 순간 그냥 이것은 싸울 일도 없고, 외면할 일도 없고, 대화하려고 노력할 일도 없어져 버려. 그런데
우리 불교를 3번째 유형으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참고 인내하고,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자비인 줄 알고,
그게 수행인 줄 알고,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 많아요. 아니에요.
우리가 쓰는 용어 중에 “뭐뭐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엄격하게 말해서 수행자는 ‘겠’자가 들어가면 안 돼요. ‘겠’자가 들어가면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의지가 들어가면 행이에요. 행은 업을 쌓는 거요.
“사랑하겠습니다.”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말은 사랑하기 싫다 이 말 아니오. “줄려고 한번 애써볼게요.” 이것은 주고 싶다는 거요? 주기 싫다는 거요? 주기 싫다는 얘기요. 그러니까
대화를 해보려고 애쓰는 것은
이미 대화가 안 된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불교는 그런 세 유형이 아니고,
안경을 탁 벗어버리는 거요.
그게 깨달음이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한 차이는 거기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훤하기 때문에 모순점을 금방 알 수가 있어요.
제가 몇 년 전에 6대종교 간에 대화의 모임이 있었는데요, 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6개 모임이었는데, 거기서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외국의 유명한 소위 신학자를 모셔 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 100명쯤 모여서 신부, 목사, 스님 모여서. 그분의 강의내용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 이런 주제였어요. 굉장한 얘기죠. 기독교인이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얘기는 할 수 있는 얘기요? 할 수 없는 얘기요. 할 수 없는 얘기지.
이분은 30년간 이것을 연구했어요. 그러니까 구약부터해서 신약 기독교 역사서를 다 연구를 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다 증거를 잡았어요. 나름대로. 그런데 이것을 안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안다고 해서 이것을 남에게 공표하기는 더 어려운 얘기죠. 그분은 어렵게 파문당할 각오를 하고 그것을 2시간에 걸쳐서 얘기를 해단 말이오. 얼마나 용감한 사람이오.
그래서 강의가 끝나자 대중이 다 기립박수를 쳤어요. 그때는 특히 감리교신학대학의 학장을 지냈던 종교 간의 대화를 주선하시던 분이 감리교에서 파문을 당해서 계시다 돌아가셔 버렸어. 그래서 전부다 다 가슴 아파 하는 시점에 그런 강의를 들었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좋아하겠어. 그런데 질문 시간에 제가 손을 들고 물었어요.
“결국 30년간 연구한 요지, 2시간 강의한 요지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 이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무 당연한 얘기죠. 너무 당연한 것을 30년간 뭐 하러 연구합니까? 너무 당연한 얘기를 2시간 뭐 하러 강의를 하느냐 이거야.
그랬더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전부 나를 어때요? “저 새끼 저거” 전부 째려보는 거요. 그리고 사회자가 이렇게 해서 끝났는데, 파토를 내려고 한 얘기겠어요? 제가? 아니겠지요. 그런데 그중에 5명이 나한테 와서 백 명 중에 5명이 나한테 와서 “하, 스님 대단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5명이나 고작 5명이.
그러니 그 울타리 안에서는 엄청나게 노력을 하고, 각오를 하고,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어서 한 행동이라도 그 울타리 밖에서 보면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 얘기하는데 목숨 걸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 얘기하는데 각오할 이유가 뭐 있어? 연구할 게 뭐 있어? 턱 보면 알지.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갇힌 상태 안에서
벗어나려면 힘들어요.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의미는 이런 거요. 우리는 늘 자기가 태어난 나라 안에 갇히거나, 그 문 안에 갇히거나, 그 종교 안에 갇히거나, 그 종파 안에 갇히거나, 그 안에 갇혀있단 말이오.
이번에 제가 스리랑카에서 세계 실천불교 대회하는데 갔거든요. 그 많은 주제가 있는 중에 하나, 남방불교에는 비구니제도가 없습니다. 여자는 수행해 봐야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비구니 중에 용감한 사람이 한국에 와서 저 보문동 보문사 있죠? 거기 가서 비구니계수계를 받아서 스리랑카로 돌아갔어요. 인정해 주겠어요? 안 해주겠어요? 안 해주겠지. 그런데 요번에는 또 대만에 있는 스님이 수백 명을 보드가야에 끌고 가서 보드가야에서 비구니계 수계를 했어. 스리랑카 머리 깎고 있던 여자분들 중에 거기 가서 수계를 받았어. 비구니가 되었어. 이게 남방불교권에서는 난리요.
그래서 여권신장이라 여성문제차원에서 비구니문제가 올라왔단 말이오. 그 갖가지 깨어있는 그 비구스님들이 그 발표가 있자, 이 “도대체 불교 망치려고 그러냐?” 그럴 때, 우리가 들으면 별일 아닌 것 갖고 서로 성내죠. 그러니까 그 울타리 밖에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을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 붓다의 가르침을 쫓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것을 못 벗어나는 거요.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래요. 그래서 제가 다른 얘기 안하고 “예, 한국에는요, 한비구니스님이 비구를 그냥 제자로 삼고 계를 줘버려서 말썽이 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전부 눈이 땡그래져서. 그런 사건이 하나 생기면 지구가 하루아침에 망할 거라는 생각을 하시는 거 같아.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예, 그래서 말썽이 되어서 인정은 안 되었습니다.” 내가 이러니까 “휴우~”
신라시대에는 다 동성동본 결혼했습니까? 안했습니까? 했죠. 그때는 근친 간에 결혼을 해야 순종을 배출하는 거요. 맞습니까? 예? 선골진골이 순종의 정도 아닙니까? 그죠? 그런데 이조시대에는 같은 성씨만 결혼해도 개XX가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런 것은 다 문화적 차이죠. 그러니까 이게 그 울타리 안에서 살면, 자기가 얼마나 그런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지를 알 수가 없어요. 꿈꾸는 사람은 자기가 꿈인 줄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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