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북한의 소련파 탄압에 주목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전 소련 외교부는 조선노동당내의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 소련공산당이 주의를 주고 수정을 요청하도록 했다(ЦХСД, ф. 5, оп. 28, д. 314, лл. 3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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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외교부 소속 정보위원회는 소련파 간부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의 처벌이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제기와 관련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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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 극동국은 ‘사실상 모든 소련출신 조선족들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고 판단했다.(427, 주187, 소련외교부저보위원회의 조선내부 개인숭배에 관한 보고서, 1956년 4월 5일. 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16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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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소련파에 대한 숙청에 제일먼저 주안을 두었다. 그것은 이미 소련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현격하게 줄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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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말 조선에는 소련에서 온 조선족 간부 136명이 있었다. 소련최고소비에트가 1955년 12월 31일 공포한 법령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의 국적만을 취득해야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조선국적을 원했으며, 24명만이 조선국적 취득이후에도ㅓ 소련 국적 보유를 희망했다.
박창옥, 박영민 등이 직위해제된후 소련국적을 포기한 것을 후회한 사람들이 많았다. 건설상 인민군위생부부장 과 같은 사람들은 소련대사관을 찾아가 소련국적 회북을 요구하기도 했다. (428, 주189 참조)
5월 30일 모스크바로 돌아간 이상조는 소련 부외상 페도렌코를 만나, 조선노동당 내부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보고했다. (428-429)
6월 8일 부수상 최창익은 비밀리에 소련대사를 만나 조선노동당의 잘못된 간부 임용문제를 보고 했다. 조선노동당의 김일성 개인숭배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공산당중앙과 소련정부의 개입을 요구했다.
한편, 당시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지도자들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에 대해 특별한 주의조치를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후르시쵸프가 김일성에게 몇가지 의견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김일성은 비판을 받아 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잘못을 수정하겠다는 정도로 대응했다.
왜 소련공산당이 김일성에게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소련파 숙청과 관련하여 모스크바는 김일성과 회담 결과를 중공중앙에 통보했다. 마오쩌둥은 소련 공산당의 조치가 잘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429, 주193, 마오쩌뚱과 미코얀의 회담기록, 1956년 9월 18일)
북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입장이 각각 달랐던 것 같다. 김일성 숭배에 대한 처리에 있어 중국과 소련이 입장을 추적확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