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 에세이, 펭수만큼의 즐거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in sct •  5 years ago  (edited)



펭수만큼의 즐거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내게 낸 시간이 아깝지 않게끔 노력합니다.



요즘, 단톡에 있는 이들 중 한 명은 펭수 프사를 걸고 얘기한다. 나는 요즘 걸걸한 목소리에 깜찍한 구석이 있는, 국밥 마니아 펭수를 되새기며 사람들을 만난다. 펭수의 영상으로 힐링받을 수 있는 시간을 쪼개 내게 시간을 낸 거라고. 물론 이 생각만 하다 보면 피에로처럼 장단을 맞춰야 할 것 같은 강박감도 생길 수 있지만, 그래도 꿋꿋이 이 생각을 갖는 이유는 스멀스멀 생기던 이기심을 단번에 잠재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줄곧 나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여겼다. '입을 열면 배우지 못하나 입을 닫으면 배울 수 있다'는, 어디선가 들은 말에 무릎을 친 뒤로부터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기보다는 들으려 하고, 약속시간보다 최소 십 분은 일찍 도착하려 애썼다. 지인들이 "어떻게 그걸 기억해?"라는 감탄을 할 정도로 편식하는 음식이라거나 그들이 재밌게 보았던 장면들을 외워냈다. 글을 쓰는 지인들이 있다면 그들의 글을 일주일에 한 편은 읽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게시글에는 좋아요를 꼬박꼬박 누르며 그들의 알림 창에 내 계정이 올라오도록,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를 알리는 일에 투자했다.


세세히 배려를 공부하니, 배려가 몸에 밴 이들의 숨겨진 노력이 보였다. 하물며 습관 하나도 3개월이 걸리는데, 배려가 몸에 배기 위해서는 관찰력과 행동을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게다가 개개인마다 느끼는 배려도 다르니 또 얼마의 신경을 써야 하는가. 인간관계에 애정을 쏟은지 2년, 이제는 특별히 힘듦을 쏟지 않아도 배려가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슬슬 놨다. 그래, 이젠 내버려 둬도 내가 알아서 타인을 배려했으니까 잠시 덮고 내 일에 매진했다.




지인이 만나자고, 언제 시간이 비느냐는 말을 했다. 현대인이 그렇듯 대답 전 스마트폰을 열었다. 캘린더를 켜고 빽빽한 일정 중 그나마 비는 시간,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정을 급박히 처리해서 빌 수 있는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 매번 신나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였으니 일정을 당기면서도 신났다. 그렇게 일곱 시간의 수면을 네 시간으로 줄인 뒤 일을 끝냈다. 언제나 즐거움 이상의 값진 시간을 주는 친구였으니,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불현듯 이 얘기를 꺼냈다.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인연인지에 관한 마음을 내비치려는 의도로.

나 사실, 사람들이 계속 만나자고 하는 거 다 뿌리치고 너 만난 거다?
오늘도 원래 일정이 있었는데. 그것도 너 보려고 얼른 끝내고 온 거야!

이 말을 했을 때 들려올 예상 답변은, "헉 정말?"이라며 감동에 젖은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반절만 맞았다. "헉 정말?" 이후에 들려오는 그의 말. "나돈데!"


왜 나는 먼저 약속을 잡자는 이는 나보다 덜 바쁘다는 편견을 기저에 두었던 걸까. 친구도 나를 만나기 위해 해야 할 일정을 미리 끝내고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단순히 약속 시간에 늦는 친구가 되지 않겠다는, 그래서 너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기초적인 정보만 갖고 있었던 내게 충격을 안기는 말이었다. 적어도 나와 동갑인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바쁘다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편협한 시각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잠시라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눈이 있으니 보이는 대로 믿게 되고, 귀가 있으니 들은 대로 믿게 되듯 아무리 타인의 입장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 버리나 보다. 다들 해치워야 할 업무가 있는데도. 내가 바쁘듯 타인도 그들의 일정과 생활에 바쁘단 걸 단순히 '시간 약속을 먼저 잡는 자'는 조금 더 아닐 거라고 단정 지어버린 나의 무심함에 무릎을 또 탁 친다.



펭수만큼 당신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없더라도, 당신이 당신의 취미와 일정을 잠시 덮어두고 내게 시간을 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대화한다. 단순히 나의 이미지를 위해서, 내가 뒷담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배려가 아닌 것. 아무리 세상의 중심을 나로 두라지만 인간관계 속에서 그 논리를 투영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드디어! 알아챘다. 스마트폰이 있어 너무도 당연해졌지만, 당장 초등학생 때만 떠올려도 놀이터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었던 친구처럼.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뚜벅뚜벅 걷다가 시간을 내어 교차로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중함을 진심으로 느낀다.


친구의 "나돈데!"라는 말을 들은 이후 배려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를 위해 당신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러 와주었다는 그 감사함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신기한 건 그로 인해 더욱 그들의 행동과 표정, 말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기억된다는 점이다. 억지로 이 사람은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고 기름진 음식을 싫어한다는 정보를 일일이 수동 저장하는 게 아니라 메일처럼 자동 저장되는 식이다.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무감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 묻는 게 아니라 내게 시간을 내주었다는 감사함에 그들의 말 하나하나가 거름망 없이 그대로 맘에 와 닿기도 한다. 그래서 궁금함에 "그래서?"라 묻는다. 참, 아무리 이론으로 익혀도 체득의 힘은 다른 건가…….



저번 주, 사람들을 만났다.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이유 없이 오지 않았고 나는 그의 지인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왜 못 왔어?"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걔 바쁘거든." 오, 1초간 밀물처럼 밀려온 나의 짜증에 스스로도 놀랐다. 마음속으로 "누군 안 바쁜가?"라는 생각이 아주 빠르게 쑥 올라왔다. 다행인 건 목구멍 위까지 올라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그 마음을 내뱉었다면 싸우거나, 혹은 분위기가 냉각되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한데. 네 시간이 중요한 만큼, 남의 시간도 중요하단다. 유아기 때부터 배웠던 얘기지만 이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스스로를 더 고찰해야 할 이유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넌 정말 왜 그래?"라고 말하는 것마저 감정 소모니까. 어차피 내일 아침 같은 반에서 보지 않을 테니 굳이 감정 소모하지 않는 쪽을 택해버리니까.


그래서 어렵나 보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이들은 나의 태도를 지적하기보다, 묵인하고 천천히 등을 돌려버리기에. 하루 만에 뒤를 홱 돌아버리는 고등학생 때와 달리 어른은 어차피 서서히 멀어지는 관계라 인식해버리니. 그래서 누군가 차차 내 곁을 떠나더라도 내 행동을 곱씹지 않는다. 그저 '아, 쟤도 바쁘구나. 그래서 연락이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얘가 날 싫어하나?'라는 생각은 안 하게 되는 걸 생각하면. 배움과 성찰은 비단 학문뿐만이 아닌, 관계에도 아주 크게 작용하는 것만 같다.


마이너스 6인 내 시력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도록, 배려에 안주하지 않도록 나아가 본다. '나의 이미지'를 위한 배려에서, '내게 와준 당신에 대한 감사함'으로 전환만 하더라도 바뀌는 진심의 깊이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래서 고맙다. 시간 내어, 글을 읽어준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펭수의 영상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똑 떼어 제 글에 시간을 투자한 당신에게, 값진 글을 선물하겠습니다.
요아 올림.

written by @hyuny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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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ㅋㅋ 나돈데 좀 의외네요 생각지 못한 대답.
잠 잘 시간 똑 떼냈지만 잘 읽어서 펭수 짤 하나 올리고 갑니다 ㅋㅋ

앜ㅋㅋㅋㅋㅋㅋ ukk 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귀여운 gif 파일까지 ㅋㅋㅋㅋㅋ 새벽 시간 똑 떼어 제게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최고로 편안한 밤 되시기를 바라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요아님도 좋은 밤 되세요 ㅎ

honeybeerbear님이 hyunyoa님의 이 포스팅에 따봉(5 SCT)을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전 펭수는 모르고
요아님 글은 좋아해요^^

펭수보다 요아!

헉 이 댓글을 왜 이제야 봤을까요ㅠㅠㅠ일주일만 일찍 봐도 일주일간 행복에 도취되어 다녔을텐데..!ㅋㅋㅋ 감사합니다 ㅠ_ㅠ 좋은 글 많이 쓸거에요...언젠가 펭수보다 유명해지길 (?)

새삼 하던 일을 무리해서 빨리 끝내고서라도 먼나고 싶은 서로가 서로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관계가 있다는 게 참 멋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요아님도 가치있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기 때문인 것 같네요ㅎㅎ

서로를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항상 즐거울 것 같네요!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 +_+ 말만 들어도 좋네요.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동경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건 이 삭막한 삶 ㅠ 버틸 수 있는 행복인 것 같습니다. ㅋㅅㅋ님도 지인분들에게 선한 연향을 미치시는 분이라 생각해요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재미있는 글 이네요, 펭수 요즘 인기가 있는 펭귄캐릭터죠.
저도 펭수처럼 다른사람들을 재밌게 해주고 싶네요

ㅎㅎㅎㅎ 벌써 구독자가 50만을 넘었죠!
누군가를 재미있게 해준다는 건 아무도 없을 때도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일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ㅠ_ㅠ 어려운 일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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