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중요하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 #1
"똑 똑"
오늘도 고요한 이 방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몇 년째 암울함만 감도는 성의 분위기, 이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의 구석구석까지 스산한 느낌의 적막함과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간간이 성안에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가 오히려 적막감을 한층 더 짙게 만든다.
정오에도 어스름이 지는 것 같은 노을빛만 비치던 이 방에도 한 때는 햇살이 비추던 때가 있었다. 언제나 싱그러운 사과의 향이 그윽하게 퍼지던 때도 있었다. 작은 소녀였던 그녀가 좋아하던 사과가 항상 방 한편에 놓여 있었고, 그녀는 그 사과를 항상 즐겁게 먹어치우곤 하였다. 매일매일 정성 들여 이 방을 가꾸고 관리를 해주던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참 즐거워했었지. 그는 단 하루도 잊지 않고 가장 달콤한 향이 퍼지는 사과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고 이제 이 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단 한 명뿐... 그 한 명으로 인해 나의 존재는 가치를 얻는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나의 여왕님. 나의 사랑스러운 여왕님.
나는 여왕 전용 욕실의 벽 한 곳에 달려있는 거울이다. 매우 거대하고 호화로운 욕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나의 고귀한 여왕님은 과한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이 방은 성 내의 다른 방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아담한 편이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항상 들려올 정도로 작다. 쓸데없는 공간은 없다. 그녀의 몸을 씻어주고 쉬게 해주는 욕조만이 존재한다. 벽에는 그 흔한 명화도 어떤 장식도 없다. 창문 하나와 거울인 나 만이 존재한다. 목욕이 끝나면 그녀의 마법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기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 옷을 입혀주는 시녀도, 바닥의 물기를 닦아낼 시종도 필요가 없다. 마법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나는 그것을 잘 안다. 이 곳에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미에 심취하는 그녀와 그런 그녀에게 심취한 나의 즐거움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가치는 내가 이전에 살아온 모든 삶을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처음 성숙해진 그녀의 눈부신 나신을 보았을 때,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낼 뻔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감탄과 탄식을 내뱉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었다. 신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 온몸 구석구석에서 고혹적인 여성성이 날 설레게 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몸이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사랑을 가득 품고 만들었는가. 그녀는 단순히 이 세상 최고의 미인으로서 칭송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도 한때는 그녀를 생각하면 끓는 마음으로 아픔을 느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존재는 그런 것들을 초월한 무언가 이다. 모든 이가 합력하여 보호해야 할 지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과 같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다. 나는 매우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아직은 작고 귀여운 소녀였던 시절. 그때에도 그녀가 품고 있던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다. 만인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고, 그녀의 미래 모습을 기대하였다. 주위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 듯 미소로 화답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녀와 대화 한번 나눈 적 없었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근시안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급급한 어리석은 사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그녀의 결혼 발표에 격하게 슬퍼하였고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인사조차 건넬 수 없는 존재였기에, 감히 말 한마디 건넬 용기조차 없었지만 나를 집어삼킨 분노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삶, 나의 가족, 내가 가진 모든 걸 태워서라도 나의 욕망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평소에 사과를 올려놓던 그곳에 나는 어렵사리 쓴 편지를 올려두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사과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 역시 나의 마음을 더욱 몰아세웠다. 나의 이 마음을 절실하게 적어낸 이 편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이제 그녀의 마음에 담아주지 않을까? 그녀가 편지를 다 읽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때의 난 그 정도로 빠져있었다. 그녀와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그 상황에 말이다. 결국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결국 해내고 말았다. 분노인지 감격인지 알지 못할 눈물들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난 그녀를 내 품에 꼭 껴안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며 나를 떼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나의 몸이 허공에 뜨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뒤돌아서 있던 그녀는 가만히 서있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몸에서 엄청난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녀로부터 어두운 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에 기겁하며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몸을 떨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그 어두운 기운은 나의 몸을 덮었다. 곧 어지러워졌다. 세상이 괴이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며 꼬이기 시작하였고, 어지러운 색으로 복잡하게 뒤얽혀 갔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내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나를 뒤덮은 어둠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갔고 모든 것이 굳어져 버렸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흐려져 가는 의식 저편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음을 안도하였다.
나는 창고에 처박히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내가 거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깊은 곳의 창고였던 것 같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이 공간에 들어오지 않았다.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다행히도 마법에 걸리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무뎌진 것인지 그 시간들이 괴롭지 않았다. 가끔 가족이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인간이었을 적의 모든 욕망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인간이었던 나는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그저 생각하는 거울이 되어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를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옮기는 것을 느꼈다. 누가 나를 만지는 감각도 느낄 수 없었지만 무언가에 씌워진 채 내가 어디론가 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십 년 만의 변화에도 나는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많은 것이 무뎌진 거 같았다. 이윽고 나를 덮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주변을 인지하게 되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정 같은 것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예전의 기억을 바로 떠오르게 하였다. 다소 어둡고 스산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지만 내가 일하던 그곳, 그녀의 욕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방에 들어왔다. 소녀에서 여왕이 되었지만 난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그녀였지만, 이제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와의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이 공간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난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은 나밖에 모르겠지. 차갑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도 내 앞에 선 후엔 얼굴에 슬픔을 가득 띄운다. 어떤 날은 욕조에 몸을 뉘운 채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무 감각도 없는 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은 나에게도 슬픔을 주었고, 분노의 편린 같은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주었다. 그때 그 운명의 날에도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것들을 느낀다. 어쩐지 그녀의 감정에 공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째선지 그녀가 오질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갑자기 성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격하게 흔들린다. 거울의 시야가 흐려져갔다. 그때 그 날처럼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거울은 문득 손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발가락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져 가던 그때와는 반대로 조금씩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거울은 다시 그 남자로 돌아왔다. 그녀의 마법이 풀린 것이다.
정신을 차린 사내는 급하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성안의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어둠이 걷혀 가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성의 중심인 홀을 향해 정말 온 힘을 다해 뛰어갔다. 사내는 신발도 옷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보였다. 정말 온 힘을 다해 내달렸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내는 자신의 여왕이 가슴에 칼이 박힌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거대한 칼은 그녀의 심장을 관통해 바닥까지 박혀있었다. 아름다운 여왕이 자신의 명을 다해있음을 사내는 바로 깨달았다. 여왕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한 사내는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주저앉고 오열하였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엎드려 바닥을 내리쳤다. 수십 년 만에 성안에 햇살이 들기 시작하였지만, 그 햇살조차 사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였다. 차갑게 식어가는 여왕의 주검 옆에 서있는 아리따운 한쌍의 남녀는 그런 사내의 모습을 보며 기쁨에 겨운 듯하였다.
...
"왕자님! 드디어 해냈군요! 근데 저분은...?"
"아마 여왕의 마법에서 풀려난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요?"
"아 정말 다행이네요. 저렇게 울면서 기뻐하다니, 저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아요."
"백설공주, 저 사람도 우리도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군요."
"네 맞아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왕국을 만들어가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의 백설공주."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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