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이런 일 저런 일: 코로나는 훈남도 만들어 낼 수 있다

in southkorea •  4 years ago  (edited)

한동안 잠잠하던 코로나 확진자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마스크 착용에 대한 규칙도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다.

처음엔 대중 교통에서 마스크를 착용한다, 였다가 그 다음 단계로 상점의 종업원과 대화할 때는 마스크를 착용한다, 였다가 이제는 음식점이나 카페에 착석 후 음식물을 섭취하는 동안만 마스크를 벗고 섭취가 끝나는 즉시 다시 써야 한다는 수준으로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나는 어제 들른 카페에서 마스크를 쓰고 미팅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목이 마르면 요조숙녀라도 된 것처럼 조심스레 마스크를 벗고 빨대로 커피를 쪽 빨아 마시고 다시 재빨리 마스크를 썼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며 투쟁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집단의 규칙에 빠르게 순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미세먼지 경보가 재난문자로 날아들던 시절에 ‘그냥 좀 덜 살고 지금 당장 자유롭게 숨 쉬겠다’며 마스크를 거부하던 나도, 요즘은 고분고분 마스크를 쓴다. 마스크 없이 현관문을 나서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직전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리는 신비로운 능력도 가지게 되었다.

마스크를 써서 좋을 일은 없는 것 같지만 (답답하고, 내 입냄새를 원하지 않게 계속 확인해야 하고, 지구촌 수억명의 사람이 매일 마스크를 써대는 현 상황에서는 환경오염 또한 불가피하게 거대한 스케일로 수반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잘생긴 남자가 이 세상에 더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강남역을 지날 때 잘생긴 남자를 한 달에 다섯명 미만으로 발견했었는데 요즘에는 모두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언뜻 훈남인 것 같은 남자를 예전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머리를 깔끔히 다듬고 단정한 몸매에 단정한 옷을 입기만 해도 적당히 훈남처럼 보인다. 물론 나 역시 눈만 드러내고 원래의 나보다 20% 정도 더 미모로운 여성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누린다.

어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당근마켓 거래를 위해 만난 닉네임 쿨거래쿨쿨님도 바로 그런 마스크 훈남 중 하나였다. 훤칠한 키, 짙은 눈썹, 마스크로 덮여 있지만 가려지지 않는 높은 콧대까지.

지난 세월, 당근마켓에서 마흔다섯개의 물품을 판매하고 매너온도가 39.6도가 되기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 존재를 의심했던 ‘잘생긴 구매자’를 만나는 날이 나에게도 오다니. (그 동안 제 물건을 구매해주신 많은 구매자분들께는 물론 감사드립니다)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쿨거래쿨쿨님은 새박스 그대로의 하이패스 단말기를 절반 가격에 후려쳐서 판매하는 나의 호방함에 감탄하며, 약속 시간을 30분 늦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스타벅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건넸다.

“팀장님이 갑자기 퇴근 전에 회의를 잡으셔가지구요. 날씨도 더운데 죄송합니다.”

잘생긴데 예의도 발라. 이 흐뭇한 순간에 내 입꼬리는 한껏 위로 올라갔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 이런 주책맞고 방정맞은 표정을 들키지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뿔싸… 자기 것 한 잔, 내 것 한 잔 후덥지근한 여름의 열기를 이기려 둘이 사이좋게 마스크를 내리고 한 모금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들였을 때 구름을 나는 것 같았던 나의 마음은 빠르게 수직하강했다.

마스크를 벗은 쿨거래쿨쿨님은 훈남의 아우라와 달리 흔남이었던 것이다. 아아…아아…

더 이상의 주접과 수작없이 쿨거래쿨쿨님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 다음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섰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스크 때문에 립스틱이 번져 입 주변이 얼룩덜룩 난리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쿨거래쿨쿨님이 이 얼굴을 봤을거란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해졌다.

클렌징 워터로 립스틱 자국을 지우고, 앞으로는 절대 립스틱을 바르고 마스크를 쓰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거래후기를 작성하기 위해 당근마켓에 들어갔다.

‘쿨커래 감사합니다. 커피도 감사히…’ 후기는 몇 글자 쓰지도 못하고 끊겼다. 우리 동네 코로나 확진자 동선을 알리는 긴급재난문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징…징…징… 코로나 시대의 다사다난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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