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영웅으로 떠오른 전투기 조종사 필리포프 소령

시리아에 있는 러시아 Hmeymim 공군기지에서 이륙하는 Su-25 전투기

2월 3일 토요일, 로만 필리포프(Roman Filipov) 소령의 수호이 Su-25 전투기와 측면에서 그를 엄호하는 윙맨(Wingman)의 Su-25 전투기는 시리아 북서쪽 이들리브(Idliv) 정찰비행을 마치고 125km 떨어진 Hmeymim 러시아 공군기지로 귀환하는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시속 975km, 고도 4,000미터…한 순간 윙맨은 선두에 선 필리포프 소령의 기체에서 번쩍이는 섬광을 보았다.

윙맨은 다급하게 외쳤다. "편대장님! 적들이 공격 중입니다! 회피기동! 회피기동!" 편대장 필리포프 소령의 차분한 답변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알고 있다. 맞았다…오른쪽 엔진에 불이 붙었다…추락 중이다…왼쪽 엔진도 멈추고 있다…기지에 구조요청을 하라!" 그리고 편대장의 마지막 명령이 하달되었다. "위험하다. 즉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 회피하라!"

필리포프 소령은 비상탈출 사출 레버를 당겼다. 엄청난 속도로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가 곧이어 낙하산이 펴지자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발밑에서는 반군들이 낙하산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윙맨은 편대장의 기지 귀환 명령에도 불구하고, 편대장을 생포하기 위해 달려오는 여러 대의 반군 차량을 보고 차마 고도를 높일 수 없었다.

윙맨이 대지공격(對地攻擊)으로 2대의 차량을 파괴하면서 반군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동안, 연료 게이지는 이미 기지 귀환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료만이 남아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목이 메었다...윙맨은 숲에 몸을 숨긴 채 반군들과 맞서고 있는 편대장을 향해 마지막 경례를 하고 Hmeymim 기지를 향해 남남서로 기수를 돌렸다.

낙하산 하강 중 반군의 총알에 부상을 입은 필리포프 소령은 Hmeymim 기지에서 구조대가 날아올 때까지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스테츠킨 기관권총(Stechkin APS)을 꺼내서 탄창을 확인하고 다가오는 반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반군 2명이 쓰러졌다. 그는 순식간에 20발들이 탄창을 비우고 새 탄창을 갈아 끼웠다. 반군들은 러시아 조종사를 생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십여 명의 반군들이 이제 수십 미터 앞까지 접근해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필리포프 소령은 반군에 생포되어 산 채로 불에 태워지거나 차량에 묶인 채 온 시내를 끌려다니다가 죽음을 맞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스테츠킨 권총을 내려놓고 수류탄의 안전 클립을 뽑았다. "잘 가라! 개자식들아!' 그는 반군을 향해 소리 지르면서 자폭(自爆)을 택했다. 34살 짧은 생은 부인과 4살짜리 딸을 두고 용감한 전사들이 죽으면 올라간다는 오딘(Odin)의 천국 발할라(Valhalla)로 떠났다.

러시아제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이글라 Igla(이번 Su-24 격추와는 상관없음)

러시아는 2015년 9월 시리아 전쟁에 뛰어든 이후 4대의 전투기와 4대의 헬기를 잃었지만 시리아 반군의 휴대용 지대공미사일 MANPADS(MAN-Portable, Air Defense System)에 의해 러시아 전투기가 격추되고 조종사가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러시아는 분노하면서 끝까지 진상을 파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도대체 시리아 반군에 MANPADS를 공급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미 국무부 Heather Nauert 대변인은 즉시 성명을 냈다. "미국은 시리아 어느 그룹에도 MANPADS를 제공한 적이 없으며, 동 무기 사용에 크나큰 우려를 표명한다." 러시아는 고민이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미 CIA는 80년대 아프간에서 무자헤딘(Mujahiden)에 미제 스팅어 Stinger MANPADS를 공급, 러시아 전투기와 헬기를 무수하게 공중분해시킨 전력(前歷)을 갖고 있다. 물론 러시아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간 MANPADS가 민간항공기 테러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긴 하다.

필리포프 소령이 숨을 거두고 1시간여가 지난 시각, Hmeymim 기지를 이륙한 러시아 전투기들이 Su-25를 격추시키고 기고만장해 있던 Jabbat Fatah al-Sham 테러세력 기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테러요원 30여 명이 정밀유도폭탄의 공격을 받고 자신들의 예상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났다. Su-25의 잔해가 여전히 불타고 있는 곳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1 : 30+α, 국가라면 의당 자국 군인의 희생에 보복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공습이 끝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군정보기관(GRU)의 요청을 받은 터키 정보부(MIT) 요원들이 현장에 출동, 필리포프 소령의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수습하고 Su-25 기체를 회수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MANPADS에 맞은 엔진을 살펴봐야 이번 Su-25 격추 사건의 배후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터키는 2015년 11월 터키 공군 F-16에 의해 러시아 Su-24 전폭기가 피격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러시아와의 외교적 긴장을 떠올리면서, 자신들이 관할하고 있는 시리아 이들리브(Idlib)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에 최대한의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2월 8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화 통화에서 시리아에서의 협력 의지를 새롭게 했다.

로만 필리포프 소령

2월 5일 밤, 러시아군 수송기 일류신 Il-76 1대가 이들리브와 인접한 터키 남부 Hatay 공항에 도착했다가 잠시 후 모스크바로 날아올랐다. 다음 날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Chkalovsky 비행장에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방관(Sergei Shoigu)을 비롯, 수많은 군 장성들이 비행기에서 내려지는 Roman Filipov 소령의 유해에 경의를 표시했다. 모스크바 도착 행사를 마친 Il-76은 마지막 행선지인 Roman Filipov 소령의 고향 보로네즈(Voronezh)로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2월 8일 오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465km에 위치한 인구 100만 명의 중견도시 보로네즈… 추운 날씨 속에서도 3만여 명의 시민들이 필리포프 소령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그의 영웅적 죽음을 애도하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소령의 부인과 4살박이 어린 딸, 그리고 아버지 니콜라이(Nikolay)와 어머니 엘레나(Elena), 여동생 마리나(Marina)가 남편과 아빠, 아들과 오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아버지는 체첸 전투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한 자신을 보면서 조종사의 길을 택한 아들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벌써부터 그립다.

푸틴 대통령은 필리포프 소령에게 러시아 최고 훈장 'Hero of Russia'를 수여하면서 국방부를 통해 필리포프 소령의 부인과 딸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 수차례 시리아에 파병되어 수십여 차례 정찰 및 공습에 참여했던 베테랑 조종사 필리포프 소령의 월급은 1700달러(약 185만 원)에 불과했다.

러시아 정부와 국민들은 필리포프 소령이 적들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응전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심과 영웅심을 높게 평가하고 기린다. 벌써부터 러시아 각 도시에서 필리포프 소령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고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터져 나온다. 3월 18일은 러시아 대선이 있는 날이다. 이래저래 푸틴 대통령이 6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죽어서 영웅이 되고 또 누군가는 살아서 영광을 누린다. 불공평하다...세상은 원래 공평하게 불공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