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부터 러닝 코스를 경복궁 돌담길로 옮겼다. 광화문에서 젊은 러너를 몇 번 보게 된 게 이유였다. 1월부터 꾸준히 달린 청계천은 젊은 사람보다는 노인이, 러너보다는 워커에 가까운, 청계천을 이동 혹은 산책 수단으로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어떤 활기를 바라며, 또 늘 같은 청계천 풍경에 지루함을 느끼며 코스를 옮겼다.
이 코스는 보통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해 청와대 맞은편을 지나 국립 민속 박물관을 거쳐 다시 광화문 광장으로 돌아온다. 커다란 원을 그리는 형태인데, 한 바퀴를 돌면 2.5km 정도가 된다. 이 코스를 달리다 보면 근사한 차림의 러너를 여럿 볼 수 있다. 달리기 실력도, 차림새도 초보인 나는 나를 빠르게 추월하는 러너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청계천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보통 국립 현대 미술관 맞은편 즈음에서 시작하곤 했는데, 직선으로 달리다 왼쪽으로 돌면 그 때부터 청와대 맞은편이 시작된다. 그 풍경은 살면서 처음 접해보는 낯선 분위기였다. 특히나 이 구간에 들어서면 경찰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달리다 보면 마치 그들이 나를 응원해주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청와대 방향으로 달리다 다시 방향을 왼쪽으로 꺾으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경복궁역 근처의 돌담길이 나온다. 시야가 가로막혀있지만, 내리막이 있어 몸은 쾌적하다. 그렇게 마지막 코너를 돌면 광화문 광장이 나온다. 최종 목적지인 광활한 광장의 끝을 바라보며 마지막 힘을 내곤 했다.
몇 번의 러닝 끝에, 이 코스를 완주한 날이 있다. 2.5km는 내 최장 기록이었다. 하지만 완주의 성취감 뒤에는 왠지 모를 허탈함이 남아있었다. 달리는 것이 너무 쉽게 느껴졌다. 내가 해온 달리기는 이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방향으로 달리는 청계천에서의 고독한 러닝이 그리워졌다. 0.1km, 0.2km씩 거리를 늘려갈 때마다 느꼈던 진하고 확실한 성취감이 그리웠다.
아침 러닝 코스를 옮기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점점 날이 길어지면서 내 기상이 해 뜨는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점이 와버렸다. 나는 이미 해가 떠 밝아진, 뛰고 나면 얼굴이 발갛게 익어오는 청계천의 아침 러닝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코스를 옮긴 것은 도피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다시 일찍 자려고 노력 중이다. 보통 러닝 전에는 40~50분가량의 스트레칭(이자 아침 루틴)을 하기 때문에, 그 스케줄에 맞추려면 4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한다. 점점 해는 빨리 뜨겠지만, 힘닿는 데까지는 그 속도를 따라잡아 보고 싶다.
어제는 늦게 잠들었는데도 5시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오랜만에 캄캄한 새벽과 마주했다. 아침 루틴이 평소보다 일찍 끝난 덕분에 아직 6시가 되기 전이었다. 날씨를 확인하니 16도, 흐린 날씨였다. 달리기 좋은 날.
평소처럼 장통교 5번 계단로 내려가 동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어느 정도 떴지만, 날씨가 흐려 구름 사이로 붉은빛이 아스라하게 보일 뿐이었다. 한 달 새 푸르고 짙어진 청계천을 만끽했다. 마스크를 벗고 미묘하게 변한 바람의 감촉을 느꼈다. 흐린 날의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몸에 와닿았다.
종아리가 아파 달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계속 걸었다. 보통 나는 1.5km를 걸어가 다시 1.5km를 뛰어 돌아오는 루트로 달리곤 했다. 오늘은 봄 풍경에 취해 2km를 걸었다. 얼마나 달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2km 지점에서 몸을 돌려 서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상쾌하고, 행복하고, 지루했다. 1km를 달리고 남은 1km를 걸어 다시 장통교 5번 계단으로 돌아왔다.
그간 무리한 운동과 부족한 휴식으로 몸이 망가져 있음을 오늘의 러닝을 통해 체감하게 되었다. 당분간은 쉬며 몸을 돌볼 생각이다. 그러는 동안 취침 시간도 함께 앞당겨볼 생각이다. 다시 또 일찍 눈을 뜨고, 일찍 집을 나서게 되고, 해 뜨기 전의 캄캄한 어둠과 걸어가는 동안 서서히 밝아오는 해를 눈에 담고 싶다. 그러다 반환점에 이르고, 언제 그랬냐는듯 몸을 돌려 해를 등진 채 목적지까지 힘껏 달리고 싶다. 어쩌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 묵묵한 고독함이 나를 계속 달리게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좋네 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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