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포탈들] 숨겨진 인연들 넷,

in stimcity •  2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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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마법사를 흔들어 깨우는 이는 한스와 잭이었다. 마법사는 루르드의 한 캠핑장에서 깨어났다. 서쪽 마녀가 잠든 그를 살포시 내려놓고 떠난 것이다.



"벌써 와 있었구나."



마법사를 깨운 이들은 얼마 전, 팀 내 갈등을 겪고 결국 박살이 나버린 밴드의 남은 멤버들이다. 실연의 상실감을 안은 채 허망해 있는 이들에게 마법사는 순례를 제안했다. 상실한 멤버들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는 포탈을 찾아보자고 말이다. 이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걷고 노래하는 일만큼 다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순례를 떠나 지구를 걷다 보면 헤어진 멤버들과 다시 조우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들은 독특하게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지구를 걷고 또 걸으면 벽에 부딪히거나 낭떠러지를 만나게 될 거라고 믿는. 마법사는 지구는 둥그니까 걸어야 한다고,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려면 걸어야 한다고 믿지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이 친구들이 좋았다. 다른 믿음은 서로를 증거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걷겠다고, 지구 끝에 도달할지도 모르는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내릴지도 모르는데 걷겠다고 용기를 내어준 이들에게 고마웠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 걷는 순례자들이 이들의 노래에 위로를 얻을 테니.



그런데 이들의 순례는 아이러니하게도 루르드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죄 없는 잉태'가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현현했던 루르드의 성지로부터 순례가 시작된 것이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믿음과 원죄에 대한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믿음은 하늘 위에 계신 신에 관한 믿음이고, 원죄는 바로 그 신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루르드의 한 소녀에게 현현한 '원죄 없는 잉태'는 기적을 베푸는 믿음이고, 그 기적은 '구덩이를 파고 고인 물을 마시렴'이라고 요청한 '원죄 없는 잉태'의 부탁에 소녀가 순종하여 일어난 일이니까. 더러운 구정물을 마시고, 선과 악이 경계가 없음을. 원죄와 속죄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합일을 통해 성화 되는 것임을 루르드의 기적의 샘물이 보여주었으니까. 지구가 평평하다는 믿음과 원죄 없는 잉태. 그 둘은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루르드에서 만났다. 그리고 박살이 나버린 이 밴드가 발표했던 단 한 장의 앨범 제목은 <Pleochroism, 多色性> 이었다.



“난 침수의식에 참가해 보려고 하는 데 너희들은 어떡할래?”
“저희는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법사는 상실의 숲으로부터 순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루르드의 샘물에 몸을 담그고 치유를 얻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원죄 없는 잉태'의 기적에 자신을 맡길 마음이 없었다. 지구는 평평하고 구원받아야 할 원죄는 십자가 위에 매달려 있으니, 상처 입은 마음을 단 한번 의 침수로 해결 받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마법사는 이해했다. 박살 난 마음으로는 기적의 샘물에 몸을 담가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버린 조각난 마음을 찾고 추스르는 것이 먼저일 테니. 게다가 이들은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마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노래, 노래, 노래.



"넌 이미 떠났는데,
난 아직 너의 방인 줄
착각하며 열어 봐.
아직도 니가 보여.
아직도 니가 들려.
아팠던 기억도 묻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인지
이런 내가 낯설고 아파도
너를 간직하며 살까 봐 그래."



마법사는 가슴속 간직한 너들을, 조각난 너들을 이제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 샘물에 몸을 담가 상처받은 마음과 상처 입은 간을 회복하고 치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멀린은 루르드 성지의 침수의식에 참가하기로 합니다. 침수의식은 기적의 샘물에 발가벗고 들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담그는 의식을 말합니다. 순서를 기다리는 멀린은 자신을 자연으로 돌려줄 이 의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시작한 캠핑 또한 인류가 잊고 있는 자연의 삶을 경험하게 해 주는 좋은 의식입니다. 흙에서 나온 자가 흙으로 돌아가고, 물에서 나온 자가 물로 돌아가는 일. 이미 결정되었고 흘러가고 있을 뿐인 탄생과 죽음의 경로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 근원을 잊지 않고 되새겨 보는 일은 기적의 여부와 상관없이 의미 있는 일입니다. 멀린, 어떻습니까? 기적의 샘에 몸을 담그니 몸이 좋아지던가요?

"몰라, 시원하긴 하더라. 옷을 다 벗고 물에 들어가려는데, 물 위에 앞 사람들의 털들이 둥둥 떠다니더라구. 나 참.."

멀린.. 베르나데트는 그걸 마셨답니다.

_ <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M.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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