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소년 창업史] #21 형의 정의는 공정합니까?

in stimcity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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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형의 정의는 공정합니까?





내가 만약 내 앞길만을 걱정했다면 나는 아마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사범대학 출신인 내게 교사가 되는 게 가장 쉬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할 당시엔 그랬다. 남자로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다닌 덕분에 사립학교 임용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물론 여자 선후배 동기들은 임용 고시 준비를 하느라 죽을 똥을 쌌지만.



아무튼 뭐, 나는 세상에 태어나 불공정이란 걸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기 재능이 아닌, 갖고 태어난 걸로 지위를 얻는 것 말이다. 그래서 같은 학번에 지 애비가 고려대학교 교수라는 이유로 공부를 지지리 못하고도 이 학교에 들어온 녀석이 있어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용서하지 못해 나는 그를 카톡에서 차단했으며 그와 말을 섞는 같은 학번 단톡방의 비겁함에 흔쾌히 동참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마도 군대를 제대할 무렵 나는 남자로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범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택할 수 있는 교사라는 편한 진로 대신 시험을 봐야 하는 기자를 택했다.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자는 교사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우스운 명분을 장착하게 되었다. 그 명분으로 한 일 년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YTN 기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YTN도 공정한 멍석은 아니었다. 거기엔 국회의원 출신 자제들이 몇 있었는데 수행력은 가관이었다. 그들은 얼마 못 가 기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기자 생활을 견디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5년 정도 지나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사회부 기자 시절 동료들 가운데 가장 많은 특종상을 받았지만 사장이 바뀌고 사장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스포츠부장 밑에 배속되었다. 거기서 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종목인 골프를 담당하게 되었다. 내 공정의 감각은 그게 불공정하다고 판단했다. 하여 사표를 던졌다. 사회부에서 세 번의 특종상을 받은 내게 주어진 상은, 하, 참으로 우습게도 사장의 직속 라인 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종목의 취재 기자였던 것이다. 그게 불공정한 처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이상한 놈일까? 사회부에서 세 번의 특종상을 받은 이는 그가 원하는 부서에 발령받아야 옳다고 믿었던 나로선 그 처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마도 당시 간부들은 내게 꽤나 괜찮은 자리를 주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장의 직속 라인으로 배치했으니 알아서 동아줄을 잡을 거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 조치는 불공정한 처사였다.



왜 나는 이런 불공정한 처사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까. 문제는 모든 이들이 겪는 불공정을 못 견디는 성미일까. 그 성미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룰이 뭔가 잘못됐다고 말하면, 네가 문제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무식한 자들이 아니다. 원래 가진 걸 더 공고히 하려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폭로하는 이들을 배타시한다. 그냥 배타시하는 게 아니라, 잡아 죽여 버린다. 대깨문들처럼 말이다.



'대깨문'이라는 단어 자체도 불편하신 형. 형이 한 번이라도 구체적으로 나를 잡아 죽여 버리려는 세력의 위협을 받으셨다면, 그리고 그게 수시로 정의를, 촛불 정신을, 친일 타파를 외친 이들이라면, 하여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세상이 경천동지하며 정의가 우뚝 설 것이라고 믿었다가 자기 믿음이 훼손되는 걸 감당하지 못해 지지 철회를 고민했던 이라면, 이해하실 겁니다. 반론을 달기 전에 하루 이틀쯤은 고민하시겠죠. 그러나 형이 대깨문의 폭력성에 대한 저의 비판에 즉각 감정적으로 반박하신 건, 1980년대의 시대정신이 아닐뿐더러 정의가 형의 고매한 정신적 취미 생활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형이 정의를 외쳤던 1980년대나, 형이 정의로운 시대의 회고를 즐기는 지금이나, 공정은 더 잘 사느냐 덜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수의 이들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나는 정의로운 부조리와 정의로운 착취에 능한 당신에게 효용이 떨어진 쓸모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형의 정의는 공정합니까?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20세기소년 창업史]

연재의 서문
#01 바누아투행 비행기
#02 낙관 패닉
#03 총체적 난국
#04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
#05 작명
#06 생애 최초의 추방
#07 20세기의 사랑
#08 20세기의 운동
#09 20세기 정신
#10 너는 추방당했거든
#11 공식적인 추방 명령
#12 자가격리
#13 초반의 불안
#14 최초의 기적
#15 노가다
#16 함몰
#17 감정노동
#18 정이 많은 조선인
#18 정이 많은 조선인
#19 푸사장이 달라졌다
#20 새로운 식구

[20세기소년 추방史]

20세기소년 추천사
#01 안갯속의 여행자
#02 분실
#03 근대 정신
#04 가짜 뉴스
#05 충동위로
#06 자유의 일상성
#07 민중의 사고방식과 언어
#08 시민 의식
#09 여행자의 눈
#10 고향
#11 용기
#12 인연
#13 메타포
#14 그리움
#15 극기
#16 짝
#17 길동무
#18 내일 일
#19 단절
#20 호의
#21 민족
#22 갑질
#23 도착통
#24 우연의 산물
#25 중국 음식점
#26 불쌍한 표정
#27 계획
#28 감시
#29 이유
#30 오르막
#31 장애
#32 동기
#33 목적지
#34 무뢰한
#35 폐
#36 탈출
#37 네 멋대로 해라
#38 전면 봉쇄
#39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민주주의
#40 의지의 표상
#41 국경
#42 스웨덴
#43 대관절
#44 술
#45 오독
#46 왔다리 갔다리
#47 시선
#48 도돌이표
#49 순간
#50 자연 활동
#51 자연과 문명
#52 자존감
#53 냉랭한 관계
#54 낭만적 무질서
#55 춤추면서 나가라
#56 방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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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timcity-lits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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