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작은 형
1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작은 형에게서 카톡 연락이 왔다.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감격스러워 하는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했다.
“살아 있었군!”
“그럼 죽냐?”
어머니가 물려주신 봉천동 반지하 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지만 나는 그의 형편이 어떨지 짐작이 되었다.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지만 작은형은 연락이 끊긴 사이 재정적 위기에 놓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 사채업자의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화기를 끊어 놓은 것이다. 그는 개인 파산과 회생 등 여러 절차적 대안을 고민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 위기에서 벗어날 것인지에 대해 나는 그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가 카톡을 보낸 건 아버지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극한의 형편에 놓여 있어도 혈육의 제사를 챙기려는 그의 살뜰한 마음이 새삼 가여웠다. 아무리 어려워도 조상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사람이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카톡 대화를 마치고 나는 한참 울었다.
이튿날부터 그는 20세기소년에 매일 출근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일을 준 건 아니다. 그가 봉천동 반지하 방에서 종일 지낼 생활이 너무 뻔해 굳이 할 일이 없어도 매일 여기 나오라고 제안한 것뿐이다. 왜냐면 여기엔 팀 춘자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보면 누구라도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형이 그들과 어울리며 회복의 에너지를 얻기를 원했다.
막상 만나고 보니 작은형은 전혀 위기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는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20세기소년을 주제로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작은형은 성장기에 늘 나와 비교를 당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막내는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는 핀잔을 시도 때도 없이 들었다. 핀잔을 들으면 더 삐뚤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상고 야간을 가출과 귀가를 반복한 끝에 겨우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우리 집안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우와 열의 서열 관계로 보지 않는다. 그가 형이라 나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듯, 내가 그보다 알량한 공부를 조금 더 잘한 게 우월한 게 아니다. 그와 나는 다른 것이다. 다만 달랐을 뿐인데,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미덕을 내가 더 영악하게 채택했던 것이다.
이런 이치를 터득하느라 나는 꽤 많은 시간의 공부가 필요했는데, 원래부터 열등하다고 치부되던 '만년 루저' 작은형은 직관적이며 통찰적으로 알고 있더라. 하여 어느 순간 나는 그 앞에서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20세기소년을 그에게 공개한 것은, 그가 의욕을 다시 불러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리고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 공간에 나타나 촬영/편집에 대해, 유튜브 트렌드에 대해 하루 8시간이 넘도록 공부하고 있다. 나는 그가 어느 하나에 그토록 오래 집중하는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러면 된 거다. 누구에게라도 하고 싶은 일에 멍석을 깔아줄 수 있다면 20세기소년의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_ written by 영화평론가 최광희 / @twentycenturyboy
[20세기소년 창업史]
연재의 서문
#01 바누아투행 비행기
#02 낙관 패닉
#03 총체적 난국
#04 모든 것을 나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
#05 작명
#06 생애 최초의 추방
#07 20세기의 사랑
#08 20세기의 운동
#09 20세기 정신
#10 너는 추방당했거든
#11 공식적인 추방 명령
#12 자가격리
#13 초반의 불안
#14 최초의 기적
#15 노가다
#16 함몰
#17 감정노동
#18 정이 많은 조선인
#19 푸사장이 달라졌다
#20 새로운 식구
#21 형의 정의는 공정합니까?
#22 내가 가진 것
[20세기소년 추방史]
20세기소년 추천사
#01 안갯속의 여행자
#02 분실
#03 근대 정신
#04 가짜 뉴스
#05 충동위로
#06 자유의 일상성
#07 민중의 사고방식과 언어
#08 시민 의식
#09 여행자의 눈
#10 고향
#11 용기
#12 인연
#13 메타포
#14 그리움
#15 극기
#16 짝
#17 길동무
#18 내일 일
#19 단절
#20 호의
#21 민족
#22 갑질
#23 도착통
#24 우연의 산물
#25 중국 음식점
#26 불쌍한 표정
#27 계획
#28 감시
#29 이유
#30 오르막
#31 장애
#32 동기
#33 목적지
#34 무뢰한
#35 폐
#36 탈출
#37 네 멋대로 해라
#38 전면 봉쇄
#39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민주주의
#40 의지의 표상
#41 국경
#42 스웨덴
#43 대관절
#44 술
#45 오독
#46 왔다리 갔다리
#47 시선
#48 도돌이표
#49 순간
#50 자연 활동
#51 자연과 문명
#52 자존감
#53 냉랭한 관계
#54 낭만적 무질서
#55 춤추면서 나가라
#56 방랑 끝
ㅎㅎ 기대됩니다. 시간많은 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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