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house) 없는 자의 집(home)

in stimcity •  3 years ago  (edited)

내겐 집이 없다. 없는 건 정확히 말해 home이 아니라 house다. 집이 없는 삶을 선택했다.

길게 따져볼 것도 없이, 주거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서 집을 갖는다는 건, 나같이 가족이 없는 이에게는 엄청난 사치다. 이를테면 수도권에 혼자 살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이 아무리 싸도 4억 원 안팎이다. 내가 집을 버리기 전의 경기도 고양시의 아파트 값도 최근 2억 원이 뛰었다. 게다가 태반이 은행 대출을 깔아 놓고 집을 사기 때문에 외형과 인테리어는 안락할지 몰라도, 사실상 빚더미 위에 누워 자는 셈이다.

집값에 들어가는 돈을 5억으로 잡았을 때 그걸 10년으로 나누면 매년 5천만 원이 된다. 그걸로 충분히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다. 원하면 유학도 갈 수 있다. 물론 5억을 그렇게 까먹기만 하면서 살면 안될 것이다. 수익이 나는 어떤 종류의 행위를 하면 된다. 노마드는 놀고 먹지 않는다. 실컷 놀고 마음껏 먹되 노마드적 삶으로부터 유의미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가치는 사는 데 필요한 재화를 구매하는, 필요한만큼의 화폐로 전환된다.

이런 삶의 방식을 채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가 필수적이다. 첫째, 한곳에 모여서 함께 머무는 가족의 개념, 다시 말해 농경 사회적 전통의 가족 개념을 바꿀 것, 둘째, 당연하지만 집의 개념을 바꿀 것. 셋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한정된 공간에서만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역시 농경과 산업 사회의 고정 관념을 버릴 것.

내게 가족은 더이상 혈연이나 결혼 제도로 엮이는 공동체가 아니다. 길에서 만나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이 가족이다. 그래서 어떤 가족은 이탈리아에 살고 어떤 가족은 프랑스에서 살며 또 어떤 가족은 일본에 산다. 가족이 있는 어디든, 거기가 내 집(home)이다. 사람은 공간에 정착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정착해야 행복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디지털 문명을 통해 더 밀접하게 더 입체적으로 연결된다. 온라인적 연결과 오프라인적 연결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사람에 정착하며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이야말로 '21세기의 노마드적 여행'이다. 그건 끝없이 순환하며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우주의 작동 원리를 흉내내는 삶이다. 내가 지금 보는 달은 8시간 뒤 유럽 대륙에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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