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그 여행은 보너스 같은 거였다. 3개월 간 인도에서 시작해 발칸으로 이어진 여행의 끝자락이 유럽인만큼 스페인에서 공부하는 절친 s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 만나는 것이 동선이 편할지, 이동편이 쌀지, 우리는 어마어마한 손품을 판 끝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 둘은 단숨에 부다페스트와 사랑에 빠졌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일주일의 시간을 부다페스트에만 온전히 할애하는 건 좀 아깝다는 생각에 즉흥적으로 근교에 놀러가기로 했다.
"맥주 양조장이나 와인 양조장 같은 데를 가자."
"당연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헝가리는 수제 맥주가 그렇게 유명한 것 같지는 않으니 와인이 좋을 것 같아."
"헝가리는 토카이 와인 유명하잖아. 거기 가볼까?"
"기차로 2시간 반이라 거리는 괜찮다. 근데 토카이 와인 달잖아. 난 단 술은 딱 질색이야."
"그럼 그냥 다른 와인 마을을 찾아보자."
대학교 친구인 s는 대학 시절부터 붙어다니며 소주와 막걸리와 소맥을 퍼먹었던 사이로 나 못지 않은 술꾼이다. 여행에서 오로지 술 먹을 궁리 밖에 안하는 술꾼 둘이 신나서 의논하며 찾은 여행지는 에게르였다. 이 여행은 애초부터 둘 다에게 보너스 같은 거여서 아등바등 좋은 곳을 갈 필요도 열심히 다닐 필요도 없기에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기차를 타고 부다페스트에서 북쪽으로 2시간을 이동하니 부다페스트의 활기차고 번잡한 모습이 기억이 안날 정도로 작은 시골마을 에게르가 나타났다. 기차역조차 한산한 동네에서 숙소를 가기 위해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순간 포도주 익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야,,냄새 미쳤다."
"그야말로 술 익는 마을이네!!"
"난 이미 취한 기분이야."
"진짜 이미 와인을 얼큰 취하게 마신 기분이야."
우리는 마치 공짜 와인을 마시는 냥 포도주 익어가는 냄새를 한껏 깊게 들이마셨다.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비행기든 배든 버스든 탈 것에서 내려 낯선 지역에 한발짝 발을 떼고 그 풍경을 둘러보고 그 지역의 냄새를 맡을 때이다. 첫 숨에 들이킨 어항 한 가운데에 갇힌 듯한 습한 공기도, 퀘퀘한 냄새도, 바다의 비린내도 소똥 냄새까지도 냄새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낯선 곳에 서 있다는 현실감이 뒤엉켜 기대감은 극도로 고조된다. 우리는 포도주 익는 냄새가 우리가 맡지 않으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 처럼 집요하게 맡으며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즐겼다. 그 때 누군가가 봉이 김선달처럼 이 냄새를 봉지에 넣어 팔고있었다면 나는 무조건 샀을거다.
냄새 뿐이 아니었다. 길가의 큰 통에 와인이 될 포도가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기억이 약간 엇갈리는데 단순히 포도를 옮기고 있는건지 길에서 포도를 으깨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그 곳에서 짙은 포도 냄새가 나는 것만은 확실했다. 싱그러운 날씨에 목가적인 마을의 분위기, 바람결에 풍겨오는 와인 냄새에 우리는 이미 취한 상태로 미녀의 계곡으로 향했다. 에게르는 대표적인 헝가리의 레드 와인 산지로 수십 개의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다. 각 와이너리는 미녀의 계곡에 와인 저장고가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현지에서 만든 와인을 다양한 와인을 한 발자국만 떼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미녀의 계곡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수십개의 와인 저장고를 돌며 배가 터지게 와인을 마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에게르를 여행지로 선택한 이유였다. 빈 속에 술을 마시면 취한다는 원칙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배를 적당히 채우고는 와인 저장고 투어를 시작했다. 넓지 않은 곳에 양 옆으로 와인 저장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대략 눈대중으로 한 30~40개 정도는 있었던 것같다. 실제로 이 곳에는 200개 이상의 지하 저장고가 있지만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건 40개 정도라고 한다. 와인 저장고는 겉에서는 작은 식당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각기 다른 모양의 간판이 걸려있고 야외에 테라스석들이 놓여있어서 더욱 그렇다. 하나 같이 벽돌로 되어있고 와인 투어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숫자가 매겨진 것 외에는 겉에서는 그다지 특별해보이지 않는 와인 저장고는 들어가면 전혀 다른 느낌의 공간이 펼쳐진다. 와인은 잘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곳은 기본적으로 동굴의 모습을 하고 있고 작은 입구에 비해 속이 깊고 넓으며 와인을 보관하기는 최적의 온도, 10~15도를 유지하기 위해 서늘하다. 음습하고 쾌쾌한 동굴 같은 곳에 교회나 성당에 있을 법한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어 문조차 벽돌로 위장한다면 감쪽 같이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대의 숨겨진 수도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눈에 보이도록 와인이 진열된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와인의 종류만 적혀있어서 우리는 각 증류소의 레드, 화이트, 로제 셋 중 하나를 느낌대로 골라마셨다. 와인 저장고는 각기 특색이 달라서 현명하고 계획적인 여행자들은 유명하고 맛있는 와인 브루어리의 숫자를 적어와서 골라 마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계획없이 마음에 드는 간판을 발 길 닿는대로 들어가 내키는 대로 와인을 마셨다. 1552년 소수의 헝가리 군대가 오스만에 대적해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을 때 그들의 승리가 황소의 피 덕분이라는 소문으로 이름 붙여진 '불스 블러드' 황소의 피라는 이름의 와인이 미녀의 계곡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이라 그 와인만 챙겨 먹었다. 원한다면 무료 시음이 가능했고 와인 잔 한가득 따라주는 술 한 잔이 고작 1유로라 모든 저장고를 돈다고 해도 무리는 없었다. 단지 우리의 주량이 버틸 수 있냐 없냐의 문제였다.
안에서 와인을 골라 밖에서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홀짝였다. 40여개나 있는 와인 저장고를 한 가게 걸러 하나쯤은 돌아다녔으니 대충세도 10군데 정도에서는 와인을 마셨던듯 하다. 유럽에서 펍크롤이라고 펍만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는 투어는 해봤어도 이런 종류의 와인 투어는 처음이었다. 보통 술을 마시고 이동을 하면서 약간 술이 깬다면 이 와인 투어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 거리 때문에 쉴 틈없이 와인을 밀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투어의 마지막에는 이 곳에서 직접 포도를 따고 정성스럽게 와인을 만드는 분들께 죄송할 정도로 술을 음미하지 못하고 목구멍에 넣는 우리를 발견했다. 어쩔 수 없는 술꾼의 숙명이다.
우리는 여행의 피날레를 위해 가장 맛있게 먹은 저장고에서 2리터 화이트 와인 한 병, 레드 와인 한 병을 샀다. 보통 대용량을 구매할 때는 손님들이 페트병을 들고 약수 얻어오듯이 받아온다. 와인 먹느라 바빴던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테라스에서 테이블 위에 거대한 와인 두 병을 올려두고 블루베리 잼과 치즈를 안주 삼아 마시며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믿을 수 없지만 술꾼 둘은 그날 밤 저 와인을 다 마시고 얼큰 취한 상태로 크게 음악을 틀어 춤을 추고 놀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동네 뿐 아니라 우리의 몸에서도 와인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정말이지 둘 다에게 행복했던 보너스 여행이었다.
방탄의 디아니소스를 들어야 겠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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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방탄에 디오니소스라는 노래가 있는 줄 몰랐어요.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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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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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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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와'라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입니다.
인, 인간의 행복은 여행의 길 위에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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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를 다니며 낯선 맛있는 술을 마실 때 제 행복은 극한으로 치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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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의 화신같은 젠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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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의 화신이라뇨!! 머리에 포도 잎을 꽂고 거대한 잔에 와인을 콸콸 따른 뒤 사진을 찍어야만 할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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