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k에게

in stimcity •  3 years ago  (edited)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난 건 6월 초 후덕지근한 날 20세기 소년에서였습니다. 새로운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어보자던 춘자가 앞 뒤 설명을 길게 하지 않고 나를 ‘20세기 소년’으로 부른 날이었죠.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꽤 복잡하게 도착한 '20세기 소년'은 생각보다 넓었고, 좀 촌스럽지만 생각보다는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마법사님과 춘자, 저는 바에 나란히 앉았고 당신은 바 건너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파스타를 만들었습니다. 버너에 물을 올려 펜네를 삶고 야채를 볶고, 홀토마토 소스를 넣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를 하던 당신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완성된 파스타를 건네 주었습니다. 파스타에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며, 장발몽 레드 와인을 여유롭게 오픈하며 환하게 웃었죠. 그 전날인가, 전전날이 당신의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보는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우리는 와인잔을 기울였죠. 담배를 피우면서 우리는 장충동 동네 상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세기 소년'의 사선에 있는 도치 피자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당신의 카츄사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지요. 유쾌한 이야기였지만, 어디에서 웃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마, 당신을 잘 몰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신에게서 인터넷 속에서 말하는 ‘관종’이나 ‘사회 부적응자’, ‘문제덩어리’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춘자는 당신의 얼굴빛이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전의 얼굴빛을 보지 못해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날 했던 얘기는 사실 많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벌써 3달 전의 이야기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1달여를 20세기 여름의 준비기간으로, 2달 동안을 20세기 여름의 일원으로 매일매일 봤죠. 세 달 동안 우리 모두는 많은 이야기를 쌓고 매일 밥을 먹으며 식구가 되었고 서로에게 스며들었습니다. 당신과 난 가끔 부딪혔고 신경전을 벌였지만 많은 빈도로 좋은 대화 친구, 술친구였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제가 만든 술을 맛있게 음미하며 빨리 마시는 사람이었죠. ‘음미’라는 명사에 ‘빠르다’라는 형용사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으나, 당신은 그걸 둘 다 해내곤 했습니다. 그러곤 늘 술에 취해 자신의 테이블에서 독서실에서 밤샘 공부하다 쪽잠을 자는 학생처럼 잠을 자곤 했습니다. 그런 당신을 보며 전 늘 알쓰라고 놀려댔지요.

지하에서 위스키를 기울이며 나누던 대화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나기 전 당신은 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step out'을 들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고 '20세기 소년'에 왔다고 했습니다. 술을 즐겁기 위해, 맛있어서 먹는 저는 천진난만하게 그 당시 왜 아침부터 그렇게 술을 드셨냐고 물었고, 당신은 자기를 파괴하기를 원했기 때문, 이라고 말했죠. 타나토스가 컸기 때문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유독 타나토스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내내 삼켰었죠. 그 이후로 당신의 bgm은 '동지를 향해 가자?'라는 노래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또 다시 뭉클했었습니다. 새로운 그 곳에서의 bgm은 무엇인가요?

당신을 보내며 아쉬움과 섭섭함, 애증을 그러모아 쓰기 시작한 편지는 너무 오래 작성되어 초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많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싶네요....그곳은 어떤가요? 행복한가요? 식당에 가려면 사흘에 한 번 코를 쑤셔야 하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한가요? 느긋하게 그 무엇도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와 방종을 즐기십시오!! 하지만, 술은 적당히!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뤄지기를!

2021년 9월 5일, 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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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젠 님. 편지를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쏙쏙 기억이 나는 글이에요. 기억력이 갈수록 후져지는 저이기에 이런 기록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래서 제가 젠젠 님께 그런 얘기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정치사를 쓸테니, 젠젠님은 생활사를 쓰라고. 젠젠님은 쉽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상황들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재능이 있거든요.

말씀하신대로 저는 프랑스에서 자유와 방종을 즐기고 있습니다. 약간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자유와 방종도 고향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는 낭만적 무질서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그런 낭만적 무질서를 아주 사랑합니다. 젠젠 님도 낭만적 무질서가 생활화된 분이죠.^^

여기가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자주 20세기 소년 생활사를 올리겠습니다. 낭만적 무질서를 즐기며 글을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태한 무질서만을 누리고 있네요. 이번 주 부터는 정말 저를 채찍질 해야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히 잘지내시길.